‘현재인’ 사모 별세 계기로 본 예수원 정신… 노동 기도 청빈, 그리고 낮은 곳 향한 열정

입력 2012-04-10 21:10


지난 6일 성 금요일에 강원도 태백시 하사미리에 있는 영성공동체 예수원의 모든 사람들(정회원과 방문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7언을 묵상했다. 오전 9시경 예수님의 두 번째 말인 “네가 너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의 묵상을 막 끝냈을 때에 소식이 날아왔다.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는 2002년 소천 받은 고 대천덕(루벤 아처 토레이) 신부의 미망인인 현재인(제인 그레이 토레이) 사모. 뇌종양으로 미국에서 마지막을 보내던 그녀가 향년 92세로 결국 하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예수원 ‘식구’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말씀은 ‘할머니’의 영혼을 향한 하늘의 소리로 들렸다.

지난 시절,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기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벽안의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아마 ‘고마움’의 서열을 굳이 매겨야 한다면 대 신부와 현 사모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들이 평생에 걸쳐 남긴 유산을 정리하며 되새겨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유산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고마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고마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대 신부 부부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던 1957년 현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미카엘 신학원 재건을 위해 7살 난 아들 벤 토레이와 함께 한국에 왔다. 1965년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강원도 오지에 영성공동체 예수원을 세웠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날 때까지 노동과 기도의 삶을 살며 청빈과 순종의 본을 보였다.

대 신부 생전에 예수원을 여러 번 방문, 두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언제나 따뜻한 부부였다. 당시 조그만 거실에는 임마누엘의 중국어인 ‘이마내리(以馬內利)’란 액자와 재인사모가 그린 인물화와 풍경화가 걸려있었다. 한 번은 재인 사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키친룸’이라면서 거실에 딸린 부엌을 보여줬다. 역설이었다. 부엌은 정말 작았다. 간신히 한 사람이 돌아설 수 있을 정도. 그 작은 공간에서 현 사모는 수많은 손님을 치렀다. 음식을 만들어 먹였고, 차를 대접했다. 이번에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도 떨리는 손으로 직접 찻잔에 차를 따라줬다고 예수원에서 그녀와 30년 넘게 생활한 민경찬씨는 밝혔다. 그녀는 남편의 단순한 내조자 뿐 아니라 예수원 식구 및 방문자들의 상담자로서 스스로의 선교 사역을 담당해갔던 것이다.

현 사모는 결혼 전 미국 전역 40여개 주에서 60여회의 전시회를 할 정도의 역량 있는 화가였다. 샬럿시 퀸즈대를 다닐 때 메이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모가 있었다. 대 신부는 처음 만난 그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 같이 아름다웠으며 정결한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대 신부와의 결혼을 통해 또 하나의 선교사로 미지의 땅 한국으로 건너오는 모험을 기쁘게 감행한 것이다.

초창기 예수원 어디 한구석 현 사모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안정감을 줬으며 산골에서 그린 그림은 예수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현 사모는 늘 “꿈으로만 생각했던 예수원이 실제로 이뤄진 데 경이를 느낀다”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고백했다.

현 사모는 남편 대 신부를 ‘Idol Breaker(우상을 깨뜨리는 사람)’라고 불렀다. 대 신부는 평생 개인 영성을 사회 정의로 연결시키려고 몸부림 쳤다. 성령·코이노니아·토지문제 등 민감한 주제와 씨름했다. 해비타트 운동, 성경적 토지 운동,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교 통일 운동 등 그를 통해 이 사회에 흘러간 예수 운동은 너무나 많다. 그는 늘 앞서나갔으며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우상을 파괴하며 지내왔다. 현 사모는 대 신부와 하늘의 꿈을 공유한 동역자였다. 대 신부 토지 사상의 토대가 된 헨리 조지와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을 소개한 사람은 바로 현 사모였다. 이들은 언제나 “성경적 관점에서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를 고민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솟아난 영성은 한국 사회로 흘러 사랑의 집짓기, 토지 공개념 등 과거에는 불가능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이 현실화됐다.

이들에게 예수원 공동체는 ‘신학의 실험실’ 이었다. 평소 대 신부는 ‘신학은 과학의 여왕’이라면서 과학이 실험실에서 치열한 연구 속에 발전하는 것처럼 신학역시 거친 삶의 현장에서 구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음은 ‘저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졌다. 예수원이란 ‘실험실’에서 대 신부와 현 사모는 신학을 살아냈다! 그리고 이들의 후예들이 지금 한국 사회 곳곳에서 예수 운동을 펼치고 있다. 적극적인 팔로워 뿐 아니라 예수원을 영적 고향으로 생각하는 익명의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들 부부는 늘 “한국교회는 ‘교회(敎會)를 교회(交會)’로 바꿔야 산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살 길은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는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다는 뜻이다. 요즘 한국 교회 상황을 돌아 볼 때 너무나 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예배는 천국가기 위한 통과 의례가 아니며 성경은 천국보다는 생활과 사회문제를 더 많이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어디서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라”고 외쳤다. 그럼에도 이들은 철저한 성령의 사람이었다. ‘기도가 노동이며, 노동이 기도’임을 강조한 기도운동가, 적극적 성령운동가였다. 성령과 사회정의의 연합이 이들의 삶에서 이뤄졌다.

부부는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돈은 중요하지만 ‘돈을 사랑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다’고 믿었다. 부부는 예배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예수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늘 “‘나의 마음을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권했다.

이제 대 신부도, 현 사모도 이 땅을 떠났다. 그들이 마음 깊이 품었고,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과 한국인, 한국 교회에 두 사람의 고귀한 뜻과 정신이 남았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으리라. 생전의 대 신부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친다.

“예수원 공동체는 산골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치열하고 거친 삶 속에서 예수원 정신은 올바로 구현되어져야 합니다.

고인의 발인예배는 16일 오전 10시 서울 정동 성공회 주교좌 성당에서 열린다.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