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 ‘젊음의 해방구’ 옛모습 그대로… ‘백마 화사랑’을 기억하시나요

입력 2012-04-10 18:11


‘백마 화사랑(畵舍廊)’을 기억하시는지. 1980∼9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아련한 추억 한 자락쯤 떠오를 만한 이름이다.

캠퍼스의 매캐한 최루탄 연기를 뒤로 하고, 교외선을 타고 달려간 그곳에선 ‘고래 사냥’ ‘친구’ 등 금지곡을 마음껏 부를 수 있었고, 독재정권을 향해 주먹질도 할 수 있었다. 젊음의 울분이 터지는 한쪽에선 ‘손 한번 잡아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싸움을 벌이는 연인들의 핑크빛 로맨스가 무르익기도 했다.

경기도 고양시 풍동의 화사랑은 바로 고양시 백석동 백마역에 있던 그 화사랑을 운영했던 부부가 그 시절의 분위기를 되살려 1999년 문을 연 집이다. 경의선 백마역이 백석동에서 마두동으로 옮겨왔듯 화사랑도 터를 옮겼을 뿐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라이브 무대도, 후한 음식 인심도 그대로이다.

봄 햇살이 화사했던 지난 8일 만난 화사랑 박상미 대표는 “예전 화사랑은 서울 신촌에서 백마로 옮겨 온 남편의 개인 화실이었다. 놀러 오는 선후배들에게 먹을 것을 차려 내다가 아예 장사를 하라는 말에 ‘畵舍廊(화사랑)’이라고 쓴 캔버스를 간판 삼아 장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때가 1979년 10월. 악기를 만지는 이가 있으면 즉석에서 연주하고, 그에 맞춰 노래하고, 수시로 미술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 참석했다 남편과 결혼하게 됐다는 박 대표는 “화가의 아내로 살 줄 알았는데 주방 아줌마가 됐다”면서도 싫지 않은지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86년 유인촌 황신혜가 나오는 ‘첫사랑’이란 드라마를 화사랑에서 찍었어요.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경의선이 1시간마다 백마역에서 정차했는데, 그때마다 1000여명씩 내렸습니다.”

당시 부근에선 갈 만한 곳이 화사랑뿐이었는데, 300석 규모였으니 손님들은 줄을 설 수밖에. 지금으로 치면 간접광고(PPL)인 셈인데 당시는 그런 개념조차 없던 때였지만 효과는 엄청났던 것. 손님이 물밀듯 몰려들자 근처에 카페가 하나둘씩 생겨나 전원카페촌이 형성됐다. 젊은이들의 발길이 몰려들면서 ‘젊음의 해방구’란 별명도 얻게 됐다. 백마의 다른 카페에서 데이트를 한 뒤에도 ‘화사랑에 갔다 왔다’고 할 만큼 화사랑은 백마 카페촌의 대표주자였다.

91년 일산 신도시 개발로 카페들이 철거되면서 화사랑은 경기도 장흥으로 옮겼다. 박씨 부부는 토털야외미술관 옆에 통나무집을 짓고 공연과 먹거리가 어우러진 문화카페 ‘화사랑’을 92년 열었다. 젊은이들뿐 아니라 중년이 된 단골들까지 찾아와 북적였다. 장흥시대를 마감한 것은 자의 반 타의 반.

“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고, 98년 여름 수해로 근처 군인들이 죽으면서 장흥은 가선 안 되는 동네가 됐어요. 또 주변에 모텔이 많이 생겨 장흥이 불륜의 온상으로 소문이 나자 그나마 손님도 발길을 끊었지요.”

예전의 화사랑을 기억하는 이들을 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뒤 2006년에는 건강을 챙기는 중년 단골들을 위해 참숯가마도 마련했다.

김혜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