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다문화 가정의 싱글맘 '네리'…억척엄마의 한국별곡
입력 2012-04-10 15:50
[미션라이프] 서울 오류동 지구촌학교 이사장 김해성 목사가 필리핀 다문화 싱글맘 가니오 네리(29·한국가스공사 국제협력팀 근무)씨를 만난 것은 4년 전이다.
한국에서 영어 교정사와 강사로 일하는 인텔리 다문화 엄마인 네리씨가 자신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고 예쁜 그녀는 대학 재학 중 필리핀 남자를 사귀었다. 그녀의 뱃속에선 사랑의 씨앗으로 생명이 잉태됐다. 하지만 그 생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남자와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태어난 아들은 말 그대로 ‘유복자(遺腹子)’였다.
싱글맘이 된 그녀는 실연의 아픔에 잠길 겨를도 없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아들을 키우며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던 한국 청년이 프러포즈를 해 왔다. 그녀는 아이 딸린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며 거절했다, 하지만 한국 청년은 “내 아들처럼 키우겠다”며 수차례 청혼했고, 그녀는 결국 사랑을 받아들였다. 2007년 마닐라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딸을 낳았다.
하지만 핏줄이 다른 아들과 남편 등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던 것도 잠깐이었다. 남편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한국에 오게 됐다. 영원히 사랑하겠다던 남편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피운 남편에게 오히려 가정 폭력을 당했고 문화 차이도 컸다. 남편은 결국 딴살림을 차렸다. 그녀는 결국 오갈 데 없이 맨몸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주변에선 소송을 권했지만 양육권을 뺏길까봐 포기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2009년 한국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을 필리핀의 친정집에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돈을 모으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과로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보고 싶었지만 돈을 아껴야만 했다. 그런 그녀가 최근 김 목사를 찾았다. 4년 전에 비해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
“자식을 떼어놓고 살아온 여인의 피눈물 나는 사연을 듣는데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지구촌학교에 보내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그녀의 아이들을 맡아서 잘 가르치겠다고 했지만, 문제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장을 팽개치고 서울로 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령 서울로 이사 온다고 해도 그녀가 애써서 모은 돈으론 집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김 목사는 ’지구촌국제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최근 개교까지 했지만 기쁘지만은 않다. 싱글맘인 그녀에게 학교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녀 뿐만 아니라 많은 다문화·이주민 학부모에게 지구촌국제학교는 너무 먼 곳이다. 왕따에 시달린 자녀들이 마음편히 다닐 수 있는 다문화학교가 생겼다고 좋아하며 찾아왔던 학부모들이 발걸음을 돌릴 때마다 김 목사는 가슴이 아렸다. 신분과 직업이 불안한 학부모들은 강남부모처럼 자녀교육을 위해 이사다닐 형편이 못된다. 그래서 아이와 학부모를 위해 숙식공간이 꼭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애만 태우고 있다.
김 목사는 고민 끝에 ‘지구촌 그룹홈’에 사는 엄마가 가나 국적의 흑진주 삼남매와 상의했다. 아이들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지구촌 그룹홈’ 1호는 ‘도담이네 그룹홈’이다. 현재 살고 있는 삼남매 가운데 장녀인 ‘도담’이의 이름을 딴, 지구촌국제학교 첫 번째 그룹홈이다. 그렇게 해서 네리의 아들 티제이(9)와 딸 미희(6)는 지난 2월부터 도담이네 그룹 홈에 살면서 지구촌국제학교와 지구촌어린이집에 다닌다. 주말이면 엄마 품에 안겼다가 주일 저녁에 그룹홈으로 돌아온다.
자녀들을 잘 키우겠다는 소망 하나로 눈물의 세월을 이겨낸 다문화 엄마 네리씨에게 ‘지구촌 그룹홈’은 교육과 생활을 이어주는 희망의 보금자리다.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네리씨가 이렇게 인사했다.
“아이들을 한국에 데리고 온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우리 애들이 그룹 홈에 살면서 지구촌학교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행복하고 꿈만 같아요. 얼마나 두려웠던지 아이들을 필리핀으로 다시 보내라는 꿈도 꾸었는데 ‘안돼요, 안돼’ 울부짖다 깨어나 꿈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어요.”
지구촌 그룹홈이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공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가정 같은 소규모 시설로 사회복지사가 엄마 역할을 하면서 5∼7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