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약물 과용에 멍드는 미군… 이라크전 등 전쟁 장기화로 스트레스 호소하자 약물처방 급증
입력 2012-04-09 19:15
“당신들 날 납치하려는 거지!”
미 공군 조종사 패트릭 버크 중위는 그날 이라크에서 19시간 동안 B1폭격기를 조종해 미국 사우스다코다주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비행 도중 잠을 자지 않기 위해 4시간마다 처방받은 각성제(덱세드린)를 한 알씩 복용했다.
이상행동이 시작된 건 그가 기지 도착 후 동료와 술집에서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였다. 그는 갑자기 미국 범죄수사 드라마 ‘24시간’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렇게 소리치며 동료를 거꾸러뜨렸다. 이어 남의 자동차를 빼앗아 운전하더니 가드레일을 들이받고야 말았다.
버크 중위는 자동차 절도, 음주운전, 폭행죄로 기소됐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군사법정은 심신미약을 이유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가 알코올, 수면부족, 40㎎의 덱세드린 복용이 초래한 섬망증(과다행동, 환각, 초조 등)을 앓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미 전역 장병들 사이에서 정신질환 관련 약물 복용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가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합법적 처방이지만, 남용 수준으로 치달으면서 각종 살인 및 폭력 등 일탈 행위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 16명을 학살한 육군 로버츠 베일즈(38) 하사도 정신질환 약물을 복용했다.
육군에 따르면 지난해 현역 육군 가운데 11만명이 우울증치료제, 마취제, 진정제, 향정신성의약품 등을 처방받았다. 8%가 진정제, 6%가 우울증 치료제를 사용했다. 2005년에 비해 8배 급증한 수치다.
이라크전쟁 이전만 해도 미군 당국은 정신질환 치료제 처방을 받은 장병을 출전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10년 넘게 이어지며 군인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자 약물 처방도 급증했고 이런 원칙도 깨졌다.
군의관들은 “효능은 충분히 입증됐다. 따라서 장병들의 자살을 막고 불안증을 치료할 수 있는 이런 의약품 처방이 없이 그들을 전투에 내보내는 것이야말로 실수하는 것”이라고 정당성을 주장한다.
전투가 벌어지는 군에서 정신질환 약물 처방은 도박이나 마찬가지라고 반론도 거세다.
장병들은 보통 180일분을 처방받는데 출격 명령을 받게 되면 사후관리가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약을 동료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심하면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기도 한다. 우울증 치료제는 세레토닌 분비를 촉진해 자살충동을 일으키거나 폭력적인 행위를 유발해 남용은 위험하다.
군의관 출신 바트 빌링스 박사는 “최근 크게 늘어난 장병들의 자살 및 살인은 정신질환 치료제 처방이 급증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면서 규제를 촉구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