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윤태일] 대학은 피로하다
입력 2012-04-09 19:31
“교수는 연구업적, 학생은 스펙쌓기에 매달리는 현장… 신명나는 미래 모색할 때”
요즘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란 책이 한국사회에 상당한 울림을 주는 듯하다. 그에 따르면, 이제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는 사라지고 긍정성이 과잉되는 성과사회로 들어섰다. 성과사회에서 사람들은 ‘할 수 있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끝없는 자기착취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피로사회라는 간명한 표현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역시 ‘실패의 향연’이란 책에서 비슷한 논지를 전개한 바 있다. 즉 우리 시대는 누구나 노력하면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사람들을 부추김으로써 경쟁적으로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누구도 실패를 피해갈 수 없고,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실패자를 양산한다. 피로사회 혹은 실패의 향연이라는 개념이 가장 극명하게 적용되는 곳이 바로 요즘 한국의 대학사회가 아닐까 싶다.
우선 요즘 대학생은 피로하다. 대학생이야말로 고등학교 때까지 부정적 금지가 지배하던 규율사회에서 긍정성이 과잉된 성과사회로 돌입한 집단이다. 대학에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부추김에 고무되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친다. 공모전이다, 청년창업이다 해서 주변의 성공적인 대학생활 이야기에, 취업 5종 세트 등 스펙 쌓기로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한 두 명의 성공신화 뒤로 무수히 많은 실패자가 있다.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에 이미 낙오자가 된 것 같은 씁쓸한 열패감에 사로잡혀, 피로하고 탈진한 상태에서 대학 문을 나선다.
대학생보다 더 피로한 사람들은 한국의 교수다. 대학교수를 지탱하는 양쪽 날개는 연구와 교육인데 이 양쪽 날개가 피로에 절어 있다. 연구에 대한 압박과 유혹은 결국 논문편수 경쟁으로 획일화되었다. 요즘 많은 대학에서 논문편수와 연동하여 노골적으로 연봉제를 실시하거나, 기본급은 동결시키면서 논문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유사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논문을 더 많이 쓰면 더 많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는 유혹에,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논문을 양산하거나 자기복제의 몰염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대학교수 역시 자기착취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면서 씁쓸한 자괴감에 빠진 피로감을 호소한다.
연구실적으로 인한 피로감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는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날개인 교육과 관련한 압박은 대학교수를 더욱 피로하게 만든다. 연구에 대한 강조가 결국은 논문편수라는 양적 지표로 귀결되는 것처럼, 교육에 대한 압박은 취업률로 단순화된다.
하지만 취업률은 경제상황 및 취업시장의 구조, 대학의 대외 평판도와 전공분야의 취업연계성, 학생 본인의 능력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연구의 논문편수와 달리 취업률 지표에 미치는 교수의 개인적인 기여도는 상대적으로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교육성과를 취업률로 단순화하여 압박할 때 교수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극에 달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교수들이 느끼는 피로감의 원인은 성과사회에서 ‘넌 할 수 있다’고 유혹하는 능력의 긍정성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 ‘넌 해야 한다’면서 압박과 금지와 당위를 강요하는 규율사회의 부정성 수준인 것 같다.
한국의 대학은 규율사회 시대에도 자율성과 긍정성을 추구한 역사가 있다. 그런데 성과사회로 전환된 지금, 사회일반의 발전수준에도 못 미치게 규율사회로 뒷걸음치면서 실패의 향연을 벌이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구성원 대다수가 실패의 향연을 벌이는 피로한 사회, 피로한 대학이 아니라 모두가 신기발현(神氣發現)하는 신명나는 사회, 신명나는 대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태일(한림대 교수·언론정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