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112’의 배반

입력 2012-04-09 19:29

우리나라에도 급할 때 쓰는 전화번호가 여럿 있다. 간첩신고 111, 범죄신고 112, 사이버테러 118, 화재 및 응급환자 119, 밀수사범 신고 125, 해양긴급 신고 122 등이다. 최근에는 학교폭력 신고전화 117이 추가됐다. 모두 세 자리 짧은 숫자에 전국 공통이다. 앞자리 숫자가 배정된 것은 외우기 쉬운데다, 예전 다이얼 전화기 시절에 접속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기 위해서다.

이 중 국민의 일상에서 가장 요긴한 번호는 112다. 1957년에 서울과 부산에 설치했다가 이듬해에 나머지 시·도로 확산됐다. 번호가 촘촘하게 붙어 있어 오접률이 높자 한때 912로 바꿀 것을 검토했지만 접속편의를 위해 112 번호를 견지했다. 미국에서는 112와 119 기능을 통합한 911, 영국은 경찰 소방 긴급환자수송을 합친 999 서비스가 있다.

112는 문명사회의 상징이다. 인간은 범죄 앞에 취약하므로 경찰이라는 공공서비스를 운영한다. 서비스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권총을 지급하는 등 폭넓은 권한을 부여한다. 경찰도 그동안 틈만 나면 112를 들먹였다. 성폭행 우려가 있을 때는 112로 신고하라고 캠페인을 벌였다. 2008년에는 휴대전화 단축번호 ‘1’을 112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도 수원 사건은 뭔가. 먹통이나 다름없는 112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여성이 다급한 소리로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신고해도 부부싸움으로 치부했다. 피해자가 “못골놀이터에서 지동초등학교 가는 길에 있는 집”이라고 장소를 특정해도 “거기 어딥니까?”를 되풀이해 묻는다. 사건 현장과 파출소 간의 거리가 도보로 7분 거리였는데도 현장을 찾지 못하면 피자집 배달부보다 못한 수준 아닌가.

조현오 경찰청장이 물러나면서 “112 시스템을 전면 개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112는 119와 달리 위치추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기대응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날로 흉포해지는 강력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원터치SOS서비스’를 성인에게 확대하는 방안을 공론에 부쳐보라.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조건을 엄격히 제한하면 오남용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찰의 자세다. 승진 잘 되는 자리를 찾아 로비하는 조직, 강남룸살롱 황제로부터 매달 월급을 받는 경찰관이 건재하는 한 112가 사랑 받기는 어렵다. 강도 잡는 경찰이 대접받는 쪽으로 조직문화를 확 바꾸어야 한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