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상온] 인종주의의 덫
입력 2012-04-09 18:30
명색이 선량(選良) 후보라면서 결코 양질(良質)은 아닌 사람의 막말이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하고 있지만 욕지거리나 상말, 막말이 아니면서도 더럽고 추한 말이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인종 청소’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청소한다는 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같은 맥락에서 ‘인종 혐오’, ‘인종 증오’도 그에 못지않다.
요즘 미국이 인종 증오 범죄로 시끄럽다. 지난 2월 26일 흑인 고교생이 별 이유 없이 히스패닉계 백인 자경단원의 총을 맞고 살해됐다. 가해자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처벌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흑인 사회가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인종차별 논란이 들끓고 있다.
깨져버린 ‘순혈주의 신화’
게다가 지난 6일 또다시 흑인을 향한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사망 3명에 부상 2명. 이틀 만에 검거된 용의자 2명은 모두 백인이다. 흑인 주택가를 배회하며 범행을 저지른 데 비춰 이 역시 인종 증오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음에도 ‘여전히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될 수 있는 게 미국’인 것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의 덫에 걸려있는 건 백인뿐만이 아니다. 흑인들도 마찬가지.
워싱턴DC 시장을 지낸 흑인 매리언 배리 시의원은 이달 초 지역구 행사에서 “우리 지역에서 더러운 가게(dirty shops)를 여는 아시아인들은 당장 나가야 한다”며 노골적인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 그는 비난이 빗발치자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호된 시집살이 당한 며느리가 시어미 닮는 꼴이다.
미국 민간단체 남부빈곤법센터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현재 약 1000개의 인종 증오 단체가 활동 중이다. 2000년부터 10년 새 인종 증오 범죄는 50%가량 증가했다. 2010년의 경우 혐오범죄는 6628건. 그중 인종 혐오 범죄가 47%였고 국적에 의한 차별 범죄도 13%나 됐다. 미 연방수사국(FBI) 조사 결과다.
문제는 이런 인종주의가 우리에게도 더 이상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결혼 이민과 노동자 유입 등으로 우리 사회가 급격히 다인종화하면서 철석같이 믿어온 ‘순혈주의 신화’가 깨진 탓이다. 더욱이 다인종화에는 우리와 혈통은 같지만 대단히 이질적인 조선족과 탈북자도 한몫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인종주의라기보다는 거의 본능적으로 다른 것, 낯선 것에 혐오감을 느끼고 적대시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더 크기 전에 싹부터 잘라야
실제로 수원에서 조선족 남성이 저지른 20대 여성 성폭행 살해사건으로 온라인상에서는 조선족을 혐오하고 타기하는 ‘차오포비아’(차오는 朝의 중국발음)가 빠르게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국 동포’라는 표현을 쓴 언론에 “무슨 동포냐”는 항의가 쏟아지기까지 한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진작 사회문제로까지 거론돼왔다. 인종적 우월의식과 경제적 이유에 더해 범죄에 대한 두려움까지 가세해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셈이다.
인터넷에는 이미 ‘대한국가사회주의연합’이라는 카페가 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우리가 왜 그들(타인종)을 공격하고 배척해야 하는지 이유는 널려있다. 그들이 우리 조국의 땅을 밟고 현지인 행세를 하는 것, 우리 돈으로 우리의 재화를 사고 섭취하는 것, 우리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 이 모든 행태에 불만을 나타내는 한민족이 있다면 우리는 인종주의에 깨달음을 주기 위한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또 한 인터넷 포털 토론 광장에 ‘단일민족 코리아’ 명의로 올라온 글은 이렇다. “다문화의 끝은 한민족에 대한 인종 청소다. 우리의 살 길은 오로지 단일민족주의뿐이다.” 인종주의의 싹이 더 크기 전에 잘라야 한다.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