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7) 주기철 목사의 참배 거부와 순교

입력 2012-04-08 18:00


“설교는 내 할일이고, 체포는 당신의 일”

고향의 개통(開通)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이광수의 계몽강연을 듣고 1913년 정주 오산학교 입학했다. 이곳에서 조만식과 이승훈으로부터 신앙과 애국, 민족정신을 배우게 된다. 1916년 4월에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안질(眼疾)로 곧 중퇴하고 실의의 날을 보내던 중 만 20세 때인 1917년 김해의 안갑수(安甲守·1900∼1933)와 결혼했다. 웅천에서 지내던 주기철은 김익두 목사의 마산문창교회 집회에서 감명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결심했다. 그래서 1922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12월 졸업한 후 12월30일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부산 초량교회(1926.1∼1931.7), 마산 문창교회(1931.8∼1936.7)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1936.7∼1944)에서 시무했다.

문창교회 시무 중인 1933년 5월에는 안갑수 여사와 사별하고 1935년 오정모(吳貞模)와 재혼했다. 1938년 2월, 제1차 검속이후 약 6년간 옥중에서 투쟁한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21일 밤 47세를 일기로 순교자의 길을 갔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1925년은 조선인의 사상통제의 수단으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 공포되고, 신사제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이 건립되던 해였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바로 그해에 향후 그가 싸워야 할 투쟁의 대상이 한반도 중심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직접적으로 신사참배 문제에 연루된 때를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문제 논의를 시작한 1931년으로 본다면 그는 이때로부터 순교할 때까지 13년간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웠고 드디어는 자기 신념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삶의 여정을 살펴볼 때 ‘신도주의’ 곧 태양신 숭배는 그의 생애를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인도해 간 영적 싸움의 대상이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저항정신이 분명하게 드러난 때는 1934년 8월이었다. 총회 종교교육부가 발간한 ‘종교시보’에 ‘사(死)의 준비’라는 설교를 기고했는데, 이 때 이미 순교를 각오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5월 초 금강산 수양관에서 200여명의 목사들이 모여 집회할 때 주 목사는 마태복음 3장1∼13절을 본문으로 ‘예언자의 권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목사는 일사각오를 가질 때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라면서 신사참배를 요구하는 불의한 권력을 비판하고 “교회지도자가 일개 순사 앞에서 쩔쩔매고 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여 임석한 일경에 의해 설교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해 12월19일 평양신학교 사경회에서 행한 설교가 ‘일사각오’였다. 주기철 목사가 거대한 조직적 폭력에 대항할 의지를 공표한 것이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체포와 투옥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구속된 것은 1938년 2월이었는데, 현존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죄목이었다. 이때로부터 4차례, 곧 1938년 2월에서 6월까지(1차 구속), 1938년 8월에서 39년 2월까지(2차 구속), 1939년 9월에서 1940년 4월까지(3차 구속), 1940년 8월에서 1944년 4월 21일 순교시까지(4차 구속) 투옥되어 6년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고문을 당했다. 그가 4번째 투옥되었을 때 평양노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했고, 평양 산정현교회는 폐쇄되었다.

주기철 목사가 유재기(柳載奇·1905∼1949) 목사의 농우회(農友會)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의성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것이 2차 투옥인데, 의성에서 7개월간을 보내고 대구로 이송되어 1939년 2월 석방되었다. 이날이 주일이었는데, 기차편으로 평양 산정현 강단으로 돌아와 행한 설교가 ‘5종목의 나의 기도’였다. 이날 포효하듯 토해 낸 설교가 그의 유언적 설교이자 그의 신앙적 결의와 확신을 보여 주는 신앙고백이었다. 이것은 연구로 이루어진 설교가 아니라 7개월간의 투옥과 그 고난의 일상에서 준비된 가슴의 고백이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가 다섯 가지 기도였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흘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그의 설교였다.

1939년 8월에 일경이 주 목사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을 때,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일경이 “(설교를)그만 두지 않으면 체포한다”고 협박했을 때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라고 대답한 일은 국가 권력의 한계를 지적한 명언이었다. 이 일로 다시 구속되었다. 3차 구속이었다.

1944년 4월 13일, 네 번째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났을 때, 갖은 고문으로 육체는 부서지고 쇠잔해져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대면했을 때 “내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오리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그 이튿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남기고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47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외로운 감옥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그것이 신앙적 정의를 위한 일념으로 살았던 한 목회자의 순교였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