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입력 2012-04-08 18:00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질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속수무책이다. 이 질문 앞에서 대답을 찾는 사람보다는 대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때로는 추측과 망상에 지쳐서 마지막 원망의 화살을 결국 하나님께 돌리기도 한다. 필자는 과거 이 질문 앞에서 지독하게 고민하는 한 여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대를 받고 자라난 이 학생은 성인이 된 후에도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과거는 현재의 발목을 굳게 잡고 있었다. 때로 조금 전진하는 것 같다가도 그 과거의 망령은 여지없이 그의 인생 걸음을 주저앉게 했다. 그의 과거를 들으면서 나는 사실 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듣는 나로서도 상처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들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고, 어설픈 신학적 답변이 오히려 분노를 만들 것 같았다.

그 후 어느 날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하는데 ‘영적군사’라는 말이 새롭게 눈앞에 다가왔다. 하나님 백성은 군사처럼 강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날은 달리 다가왔다.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하나님의 눈에 그 백성들은 오늘도 엄연히 전쟁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처를 당하는 것을 과연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은 여기에 미쳤다. 대답은 ‘아니오’. 군인이 전쟁터에서 상처를 전혀 입지 않는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전쟁터에서 뛰고 달리는 군인이 자신이 입은 상처를 도무지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어 한다면, 우리는 그런 군인을 ‘바보’라고 할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억울해할 겨를조차 없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전혀 상처를 입지 않고, 깨끗하고 뽀얀 얼굴을 하고 있는 군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정체성을 의심해야 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은 상처입고, 검게 그을린 망가진 모습이 당연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영광이다.

내가 전쟁터를 달리는 군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이런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질문 자체가 틀린 질문이다. 그것은 시간 낭비다.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 역시 우리가 ‘불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상처들은 군인으로 살아간 우리의 훈장이리라.

다시 그 여학생을 만나면 나는 이제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해줄 말이 있다. ‘그 질문을 하지 말자’고!

<서울 내수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