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4) 라 베르나 산의 오상(五傷) 체험
입력 2012-04-08 18:05
천사가 프란체스코 몸에 못박음 상처내고 피흘리게 한 뜻은?
성 프란체스코가 우리를 끄는 힘 중의 하나가 바로 영적 체험이다. 그는 라 베르나 산에서 교회 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 소위 오상(五傷) 체험이다. 예수님처럼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처가 나고 실제 피가 흐른 것이다.
아시시에서 라 베르나 산까지 가는 사이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만일 프란체스코처럼 하나님의 불이 임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루돌프 오토의 말대로 하나님의 불은 우리에게 매혹적이면서 또한 두려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두려워하면서도 누구나 속으로 바라는 신비로운 체험, 버스 안에서 연신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섞였다.
라 베르나 산은 아펜니노 산맥의 한 부분으로 높이가 1283m에 이르는 높은 산이다. 성 프란체스코와 관련된 지역은 해발 1128m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라 베르나 산은 원래 이 지방의 지주였던 오를란도 카타니 백작의 소유였다. 프란체스코가 이 지역을 지나갈 때 몬테펠트로라는 마을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감명 깊게 들은 카타니 백작이 이 산을 프란체스코에게 선물했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을 보내어 답사하게 한 후 이 산이 기도생활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였다.
라 베르나 산에 도착하면 너른 광장이 나오고 광장을 지나면 아시시 대성당과 비슷한 교회가 나온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갈라진 바위가 나오는데 프란체스코가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곳이다. 거기서 얼마 안 되는 곳에 프란체스코가 오상을 체험했던 곳이 있다. 그곳에는 13세기 말에 만들어졌다는 육각형의 대리석 표시가 있고 그 위에 고딕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천상의 광채가 빛났고, 새로운 태양이 빛났으며, 바로 여기에 세라핌 천사가 나타나 프란체스코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청하면서 여기에서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흔을 박아주셨도다.”
프란체스코가 이곳에 와서 기도를 시작한 것은 1224년 여름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40일간의 기도를 시작했다. 그가 거기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할 때 두 가지 빛이 그 영혼에 비추었다고 한다. 하나는 창조주를 아는 빛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아는 빛이다. 그가 하나님께 “주님,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비참함을 알았고,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처럼 천하고 더러운 벌레를 방문하십니까?”라고 기도할 때 화염 속에 계신 하나님이 불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다음날 프란체스코는 새벽 동이 트기 전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계속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께 간구하오니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첫째는 저의 생애 동안 제 영혼과 육체가 가능한 한 많이, 사랑하는 당신께서 당한 가장 고통스러운 수난의 고통을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그 크신 사랑을 저로 하여금 할 수 있는 한 많이 제 마음에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그때 하늘로부터 불타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한 스랍 천사가 내려왔다. 그 천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녔으며 여섯 개의 날개 중 두 날개는 머리를 가리고 두 날개는 날 수 있도록 펼쳐져 있으며, 다른 두 날개는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 사건 직후 프란체스코의 몸에는 이상한 흔적이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에는 못으로 관통된 흔적이 나타났고, 못의 윗부분은 발바닥과 발등에, 못의 아랫부분은 반대쪽으로 나온 것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손바닥에는 안에서 볼 때는 둥글지만 반대쪽에서는 네모꼴 모양의 흔적이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것 같은 네모꼴 상처가 나타났는데, 그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와 튜닉과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처음에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레오 형제에게만 알리고 그 상처를 돌보아 주도록 부탁했다. 레오는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붕대를 못자국에 감아주었다. 프란체스코의 이 체험은 기왕의 유명하던 그의 이름을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세대에 신비체험의 모델이 되었다.
프란체스코의 오상 체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불의 하나님이시다. 불은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사랑의 강력한 상징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불 가운데 언약을 맺었고,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아비후는 불 가운데 타죽었다. 엘리야는 바알 종교와 하늘의 불을 두고 다퉜고, 모세는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 맨발로 섰다. 이사야, 에스겔은 불 가운데 임한 하나님과 스랍들을 엎드려 만났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빛난 주석 같은 인자 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렸다(계 1:15∼17).
불은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모든 성도의 영적 갈망의 표상이었다. 신신학자라고 불리는 시므온(949∼1022)이 그 중 하나다. 그는 하나님 체험을 ‘빛의 도취’ ‘불의 움직임’ ‘내 속에 있는 불꽃의 소용돌이’라고 불렀다. 그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광에서 오는 불과 동일시했다. 성령은 곧 마음의 불이다. 하나님은 불의 원천이며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될 때 빛의 공유자가 된다. 그가 지은 찬송가의 한 부분이다. “나는 불길에 휩싸였네. 나는 불탔네. 내 모든 존재 불에 타고 있었네…. 그분이 갑자기 거기 계셨네. 불이 철로 나를 녹이듯이, 빛이 크리스털로 나를 녹이듯이, 그분은 나를 온통 불로 만드셨네.”
철봉이 뜨겁게 달궈지면 불이 되는 것처럼, 공기가 햇빛으로 빛날 때 조명을 받는 것처럼, 성도의 내면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그것이 녹아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불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강력한 상징이다. 불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한다. 금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금은 가만히 있고 불순물만 제거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불순물이 소멸될 때까지 우리 영혼을 불속에 두신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불 앞에 서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바 요셉이 아바 롯에게 찾아가 말했다. “아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기도와 금식, 침묵과 묵상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 생각을 순결하게 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을 더 해야 합니까?” 아바 롯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쳐들었다. 그때 그의 손가락은 마치 화염처럼 되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의 몸 전체가 화염이 될 수 있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눅 12:49).”
이 불이 우리 가운데 붙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0년 교회 역사는 곧 불의 역사였다. 이 불이 붙은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은 시대에는 영적 흑암이 지배했다. 우리에게도 이 불이 있는가? 이 불로 인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흔이 있는가?(갈 6:17)
프란체스코 오상(五傷) 체험의 의미
-하나님은 불의 하나님, 불은 신적 본성과 사랑의 강력한 상징.
-성령은 마음의 불,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될 때 빛의 공유자가 돼.
-불은 우리 내면의 불순물을 제거, 생각을 순결하게 정화시켜.
-2000년 교회 역사는 불의 역사, 이 불이 붙은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은 시대에는 영적 흑암이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