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⑨ ‘우리’라는 익명성의 진화… 시인 이근화
입력 2012-04-06 18:12
이근화(34) 시인은 또래 시인들과는 달리 속도감이나 변화, 신상품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스펙터클한 인생은 싫다”고 말하는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 강의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무 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좋아하고 집안일과 요리도 좋아한다는 그는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는 쾌감 같은 게 있다”고 털어놓는다.
고요하고 조용한 일상, 당연한 듯이 주어진 것들 속에서 그는 언뜻언뜻 물음표가 똑똑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데 ‘왜 그렇지?’ ‘어떻게?’ ‘정말로?’ 같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가끔 다른 장르와의 소통을 위해 영화나 전시회 등을 보러 다니는 그는 “문학은 영화나 음악에 비해 촌스럽고 투박한 장르”라고 말하면서도 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순 없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단초는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는데/ 발을 굴리면서/ 왜 트럭은 먼지를 일으키고/ 승용차는 저리도 검은가 생각하는데/ 바퀴들이 눈 같고 입 같다/ 나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중략)// 우리는 서로 다른 속도로 취하고/ 가로등이 두 개로 세 개로 무너지고/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신발이 숨을 쉰다/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자전거를 타자/ 바퀴를 굴리면 쏟아지는 달콤한 풍경들이/ 우리를 지울 때까지/ 우리의 이름이 될 때까지”(‘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분)
‘연대’에서 ‘연동’으로 전환된 시대코드
우리가 아닌 너와 나의 개별적 ‘함께 감’
‘우리’는 두 가지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너와 나를 묶는 집단성이고 둘째, 우리와 너희들을 나누는 타자성이다. 그런데 이근화는 ‘우리’라는 집단성이 지워질 때까지 자전거 바퀴를 굴리자, 라고 제안한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는 에세이 ‘구름 위의 집’에서 이렇게 말한다. “얼마 전까지 ‘연대’라는 말이 유행이었는데, 이제는 ‘연동’이라는 말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연대는 ‘우리’라는 덩어리를 강조하지만, ‘연동’은 ‘나’와 ‘너’가 개별적으로 ‘함께 감’을 말하는 것 같아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어져 있고 그래서 하나의 움직임이 있고 그것에 조응하는 다른 움직임이 있다면, 저는 그 ‘움직임’을 촉발하는 실제적 힘과 에너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라는 호명 방식에는 이데올로기적 색깔이 배어 있다. ‘우리’라는 말에 감정과 이념의 집단적 동일성이나 집단적 주체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근화는 ‘우리’라는 호명 방식이 갖고 있는 집단적 주체성의 무게를 지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에 ‘우리’는 너무 자주 호명되고 무한증식됨으로써 오히려 그 주체성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지워야 할까.
“나의 기분이 나를 밀어낸다/ (중략)/ 우리는 바쁘게 우리를 밀어낸다// 나의 기분은 등 뒤에서 잔다/ 나의 기분은 머리카락에 감긴다/ 소리 내어 읽으면 정말 알 것 같다/ 청바지를 입는 것은 기분이 좋다// 얼마간 뻑뻑하고 더러워도 모르겠고/ 마구 파래지는 것 같다/ 감정적으로 구겨지지만/ 나는 그것이 내 기분과 같아서/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전문)
시에서 ‘나’와 ‘나의 기분’은 분리돼 있다. ‘나의 기분’이 ‘나’를 밀어낼 때 ‘감정적으로 구겨지지만 바로 그것이 내 기분과 같아서 청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에는 자극적이거나 파괴적인 이미지, 어휘가 없다. 다루는 소재도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럼에도 모든 게 ‘청바지’라는 익명성으로 함몰되고 있다. 익명성의 공간으로 가볍게 흩어져버린 언어에서 우리의 감정은 이상한 방식의 진화를 경험하게 된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