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선거공보를 펼쳐보니…
입력 2012-04-05 18:48
수요일 저녁에 퇴근하니 선거공보가 보였다. 선거를 꼭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봉투에는 지역 후보 5명과 비례대표 공보 15종이 들어있었다. 밤늦도록 인쇄물을 보고 느낀 점은 난감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이 부족했다. 이들은 스스로 지역일꾼인지, 나랏일을 하는 지역대표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별로 숙원사업을 보면 지방의원을 뽑는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 공약을 이행하려면 국회에서 예산편성할 때 의원들끼리 돈 따먹기 경기를 해야 하는 데 그게 제로섬 게임이다.
서울 동작구를 보자. ‘주인집 도련님과 머슴의 대결’로 일컬어지는 이 곳에서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는 “동작구는 한강대교 남쪽에 있어서 다른 강남권보다 먼저 개발된 곳인 만큼 앞으로 강남에 맞먹는 도시 인프라를 갖추겠다”고 공약했다. 이 지역에서 17대 때 당선됐던 민주통합당 이계안 후보는 “본인이 여당 대표까지 했으면서 지역을 위해 뭘 했나”고 비판했다.
마음에 닿는 출사표 없다
국회의원이라면 국가발전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의원들이 만날 지역만 돌보면 안보나 외교, 재정은 누가 챙기나. 국회의원으로서 도울 일이 있지만 본말이 바뀌어서는 곤란하다. 23년간 미얀마 민주운동가로 활동해온 아웅산 수치 여사가 지역개발 공약을 잘 해서 보궐선거에서 승리했을까. 지역현안은 지방의회나 단체장을 뽑을 때 내세울 일이다.
그러다보니 무리수가 나온다. 새누리당 후보가 정당하게 영업허가를 받은 홈플러스 입점을 반대한다. 민주당 후보는 지난 2월 개관한 박정희도서관을 어린이도서관으로 바꾸겠단다. 무소속 후보는 “국민의 말씀을 경청(傾聽)하고 실천(實薦)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컴퓨터 단어묶음에는 ‘實踐’만 뜬다. “모두가 침묵할 때 할말은 했습니다”라는 구호를 내건 후보는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을 한 사람이다.
지역은 다 그렇고 그러니 중앙당의 공약을 보라고? 양대 메이저 정당의 공약은 비빔밥 같다. 재료를 알 수 없도록 다 섞어버렸다. 이를테면 새누리당이 말하는 ‘변화’의 뜻을 알 수 없다. 야권연대를 이룬 곳에서 민주통합당 후보가 뽑히면 한·미 FTA를 폐기하겠다는 통합진보당 공약을 실천하는 건가.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지상목표인 통합진보당은 안보에 관한 공약이 전무하다. 청년당은 이름과 걸맞지 않게 안철수 이름 하나에 기대고 있다.
비례대표를 낸 정당의 공보 중 눈에 띄는 곳은 국민생각과 녹색당이다. 국민생각은 기호에 맞춘 6가지 공약이 명료하다. 녹색당도 심플한 양면지에 주의주장을 쉽게 설명했다. 다만 녹색당을 돕는 친구인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진보신당 공보물에도 등장해 16번을 찍자고 권유한다. 겹치기 출연한 우 교수는 과연 몇 번을 찍을까.
‘次惡’이라도 선택하는 게 도리
비례대표 명단을 보면서 드는 아쉬움은 또 있다. 그들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금배지를 달 것으로 확실시되는 체육인 이에리사나, 민주당에서 21번을 받은 ‘통일의 꽃’ 임수경 같은 분의 정치관이 궁금한데도 아예 언급이 없다. 통합진보당은 11명의 명단을 싣고도 한 줄짜리 구호에 그쳤다.
사정이 이러니 유권자로서 난감하다는 것이다. 대의정치를 실현하는 선거로서 격이 한참 떨어지기에 그렇다. 개그맨 김병만이 아무리 붓두껍 바퀴를 돌고 또 돌고, 지상파 방송 3사의 여성앵커가 웃음으로 투표를 권유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투표는 의무이기에 포기할 수는 없다. 선거라는 게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는가.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