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5) 베들레헴과 에브라다
입력 2012-04-05 18:11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 관련 계보를 왜 다르게 기술했을까?
필자는 마가복음의 필치와 문장 그리고 마가의 행적 등을 추적하며 그가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꽤나 실리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래서인지 마가복음은 복잡한 서론을 생략하고 명쾌한 서두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헬라의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실리적이었던 그가 놀랍게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이다. 그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지 못했고,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120명에도 들지 못했으나 모친과 외삼촌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다. 또 수만 명의 성도들과 그들 중에 일어나는 기적들을 목격하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 혈통이나 가문은 무의미했다. 그러나 후일 마태는 그분의 계보를 적어 놓았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 1:1∼2)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이 계보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유다에 초점을 맞춘다. ‘낳고..’를 거듭하던 유다 지파의 계보는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는 왕실의 계보로 이어지다가 바벨론에 잡혀간 여고냐(여호야긴)로부터 요셉까지 연결된다.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5∼16)
그러나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되었으니(마 1:20) 요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가 역시 누가복음에 요셉의 계보를 적어 놓았는데 그 계보는 ‘낳고’가 아니라 ‘그 위는’으로 쓰며 요셉에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눅 3:23)
그러나 이 계보는 솔로몬이 아닌 나단을 거쳐 다윗과 연결된다.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눅 3:31)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또는 밧수아)에게서 낳은 네 아들 중 세 번째였다.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대상 3:5)
여기서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계보가 달라진다. 마태복음에는 다윗의 넷째 아들 솔로몬에서 요셉까지의 계보가, 누가복음에는 요셉에서 나단을 거쳐 다윗과 연결되는 계보가 적혀 있는데 이들 두 계보는 그 사이의 이름들이 모두 다르고 사람 수도 다르다. 솔로몬에서 요셉에 이르는 마태복음의 세대는 26대이고, 요셉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누가복음의 계보는 나단까지 41대이다. 마태의 계보를 다시 살펴보면 유다 왕의 계보 중 4명이 빠져 있다.
“그의 아들은 요람이요 그의 아들은 아하시야요 그의 아들은 요아스요 그의 아들은 아마샤요 그의 아들은 아사랴요 그의 아들은 요담이요”(대상 3:11∼12)
이들 중 요람과 웃시야(아사랴) 사이의 3대가 없는 것이다. 요람(여호람)은 북왕국의 왕 아합과 두로 여자 이세벨 사이에 태어난 딸 아달랴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하시야를 낳았다. 아달랴는 아하시야가 죽자 6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며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했다. 마태는 그 아달랴의 소생 즉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등 3대를 왕실의 계보에서 삭제한 것이다. 마태가 삭제한 또 하나의 이름은 여고냐의 부친인 여호야김이다. 열왕기는 그가 악을 행한 자로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 23:37)
마태가 유다 왕실의 계보에서 4명의 이름을 삭제한 것은 그것이 꼭 ‘혈통’의 계보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약속’의 계보가 아닐까?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그 약속은 다윗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3∼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그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은 ‘의로운 사람 요셉(마 1:19)’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요셉에서 나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누가복음의 계보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독자들이 이 문제로 의아해 하듯 마태와 누가의 기록 때문에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당황했을 것이다. 본래 세리였던 마태의 경력은 그가 자료를 철저하게 뒤져내는데 달인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의사 누가(골 4:14)’는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눅 1:3) 정확하게 정리하고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또 그들은 직접 마리아를 만나 인터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태와 누가의 다른 두 계보를 교회가 그냥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한 초대 교회에서는 실제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그 중 하나가 이스라엘의 양자 관습으로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헬리가 자식 없이 죽자 그 형제 야곱이 헬리의 아내를 데려왔고, 그녀에게서 요셉을 낳았다. 즉 야곱은 요셉을 낳았고, 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 된 것이다.”(유세베우스 ‘교회사’ 1-7)
또 한 가지는 누가복음의 계보가 마리아 쪽의 계보라는 것이었다. 즉 헬리는 마리아의 부친이었으며, 장인도 역시 아버지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뱅은 마리아의 가문 역시 다윗의 혈통이었다는 것이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임을 증거하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보았다.
“족보를 볼 때에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점에서만 다윗의 후손이심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칼뱅 ‘기독교강요’ 2-13-3)
그러나 로마 교회는 아직 그것으로 안심하지 못했다. 헬리가 야곱의 형제라든가, 또는 마리아의 부친이라든가 하는 것이 성경이나 다른 어떤 자료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로마 교회는 오히려 ‘외경 야고보서’에 적혀 있는대로 마리아의 부모가 ‘요아김’과 ‘안나’라는 전승을 받아들이고 있다.
“요아김은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안나는 달이 차서 9개월만에 해산을 하고 그 아기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하였다.(‘외경 야고보서’ 5:1-2)
예루살렘에는 지금도 마리아의 모친을 기념하는 ‘안나 교회’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마리아의 친족으로 나오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안나 쪽 즉 마리아의 외가 쪽 친족이었을 것이고 제사장 가문인 레위 지파(눅 1:5)였다. 그리고 외경 야고보서는 마리아의 친가를 유다 지파라고 했다.
“마리아는 다윗 지파 출신이며”(‘외경 야고보서’ 10:1)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시 누가복음의 헬리는 누구냐는 문제가 남는다. 필자는 이 문제로 고심하다가 문득 예수 탄생 740년 전에 기록된 미가서를 떠올렸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시리라는 유명한 예언이다. 그런데 왜 미가는 베들레헴에 ‘에브라다’를 함께 적은 것일까? 에브라다는 본래 베들레헴에 근접한 별도의 성읍이고, 그 이름은 갈렙(헤스론의 아들 글루배)의 아내 ‘에브랏’에서 왔다.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들었더니 에브랏이 그에게 훌을 낳아 주었고 훌은 우리를 낳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대상 2:19∼20)
그 브살렐은 시내산 밑에서 성막의 제작을 주도한 기술자였다(출 31:2). 훌이 길러낸 유다 지파의 기술자들은 모세의 처가인 미디안에 속하는 ‘겐 족속’의 기술자들과 함께 에브라다에 모여 살았다.(대상 2:50∼55)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대상 2:55)
혹시 누가복음의 계보는 그들 기술자 집단을 이끌어온 역대 지도자의 계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유다 지파의 계보가 솔로몬에서 요셉까지 26대를 이어오는 동안 이들의 계보는 41대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목수였고(헬라어로 테크톤, 즉 건축기술자) 예수 그분도 목수였다. 결국 누가복음의 계보는 ‘충성’의 계보 것이 아니었을까? 미가가 적어 놓은 ‘베들레헴과 에브라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레갑의 충성’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