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청호동, 외부의 시간 ‘재개발’이 지우다… ‘아바이마을 사람들’

입력 2012-04-05 18:16


아바이마을 사람들/엄상빈/눈빛

시간이 멈춰진 마을이 있다.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양양 출신의 사진작가 엄상빈(57)이 아바이마을을 처음 찾은 건 대학생 때인 1975년 겨울이다. 설악산 동계등반을 마치고 청호동으로 가기 위해 갯배를 탔다. 한 노인이 자전거와 함께 갯배에 오르려는 순간, 그가 성급하게 갯배 줄을 당기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노인은 바닷물에 빠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달려들어 노인과 자전거를 급히 건져 올렸지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의 노인은 갯배 관리인에게 ‘내가 기름장수라고 만만히 보는 거냐’며 화풀이를 해댔다.

1983년 속초고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그는 다시 청호동을 찾는다. 청호동에 주소를 둔 한 학생이 입학 이후 장기결석 중이었다. 학교에서는 자퇴원서라도 받으라고 독촉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집을 안다는 학생을 앞세워 가정방문을 하게 됐다. 좁은 골목 중간쯤, 부엌을 통해 들어가는 집 안방에 학생의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담임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온 아버지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문을 사이에 두고 부부 간에 격한 다툼이 벌어졌다. 부엌과 안방 사이의 미닫이문이 내동댕이쳐졌다. 용케 도장을 받긴 했지만 자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학생의 딱한 사정은 들어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자리를 떴던 3년차 애송이 교사는 이후 사진촬영을 위해 청호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청호동은 한국전쟁 이후 주로 함경도 피란민들이 모여든 곳이다. 석호(潟湖)인 청초호는 천연 항구로 쓰였고, 넓고 길게 자리 잡은 사주(沙柱)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임자 없는 바닷가 모래밭엔 피란민 임시 가옥이 지어졌다. 고향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저마다 신포마을, 앵고치마을, 짜꼬치마을, 신창마을, 흥원마을, 단천마을, 영흥마을, 이원마을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마을들의 통칭이 ‘아바이마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벽에 시멘트를 덧바르거나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고 방을 늘려 나갔다. 사람 지나다니는 골목길은 신발 벗는 댓돌이자 마당이 됐고, 오후에 그늘지면 이웃들이 모여 앉아 감자를 깎거나 콩나물을 다듬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랑방이 되기도 했다. 그 후 공동 화장실이 개별 화장실로 바뀌는 등 변화가 다소 있기는 했지만 골목의 형태나 가옥의 뼈대는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1986년 엄상빈은 속초상업고등학교(현 설악고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고 나서는, 자전거로 수 킬로미터를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청호동을 거쳐서 퇴근하기’를 일상화한다. 하지만 인물사진을 찍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특히 어른들은 사진 찍히기를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개들마저 훼방꾼이었다. 골목에서 개 한 마리가 짖으면 그 골목의 개들은 다 나와 짖어대고 바짓가랑이를 물어댔다. 어느 날 동네 할머니에게 왜 그토록 개가 많은지 물었다. 대답은 “어렵게 살던 때니 돈 된다고 그랬지…”였다.

누군들 그 허름하고 누추한 자신들의 삶을 드러내고 싶었겠는가. 복귀 가능 난민인 ‘피란민’ 신분에서 복귀 불능 난민인 ‘정착민’ 또는 ‘실향민’ 신분으로 바뀐 채 절망과 고통 속에서 몇 십 년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처지에, 사진기나 둘러메고 다니는 개천 건너 사람을 곱게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때 찍어둔 이발소, 담뱃가게, 오징어 덕장, 양복점, 가게 간판, 갯배, 좁은 골목길, 안방, 부엌, 조개잡이 목선, 그리고 이제는 다시 볼 수도 없는 아바이, 아마이들의 모습들 또한 화석처럼 사진으로 남아 청호동의 역사를 대신하고 있다.

술만 드시면 아들한테 배를 만들어 달라고 조르던 김 노인도 돌아가셨고, 늘 취중에 내뱉는 체제 비판의 목소리가 화근이 돼 정보기관으로부터 시달림을 받던 이 노인도 돌아가셨다. 이들은 귀향에 대한 희망도 품어보지 못한 채 속초 인근 야산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골프장 개발, 아파트단지 조성, 우회도로 건설 등으로 거기에서도 내몰려 어딘가로 이장됐거나 한 줌의 재로 흩어졌다. 청호동에 거주하는 함경도 실향민은 1999년 통계에 의하면 1155세대 중 800세대로 약 70%에 달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2008년 4월 통계에는 청호동 주민 2479명 중 340명으로 13.7%에 불과하다.

청호동 주민들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8·15 이산가족상봉 때 50년 만에 펼쳐지는 감격의 장면을 텔레비전 앞에서 그냥 지켜보는 일로 만족해야 했다. 우선 ‘컴퓨터 추첨’이라는 낯선 방식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북에 남겨둔 가족들의 신분상 안전을 위해 월남 사실 또는 남한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밝히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이산가족상봉을 신청조차 못한 채 남과 북의 체제와 현실을 원망하며 절망만 맞봐야 했다.

한국에서 북한 땅 함경도를 빼고는 함경도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 실향민 분포가 단일 지역으로는 전국 최고인 청호동에서 이산가족상봉의 행운은 그 후 10년이 지난 2010년에야 첫 상봉자가 나오면서 찾아왔다. 아바이마을의 시간이 멈춰 있되, 외부의 시간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흘러들어 그 멈춰있는 시간을 지우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