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香품은 고택 “조선시대로 시간여행 떠나요”… 경남 산청 남사마을의 ‘오매불망(五梅不忘)’

입력 2012-04-04 18:42


지리산 천왕봉이 진산인 경남 산청 단성면의 남사예담촌은 해마다 매화 향기가 그윽하다.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가 귀양살이를 오고,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이 하룻밤을 묵어갔던 남사예담촌은 고려의 왕비와 조선의 영의정이 태어난 유서 깊은 마을.

경남의 하회마을로 불리는 남사예담촌에는 집집마다 오래 묵은 매화나무 한두 그루씩 없는 집이 없다. 그 중에서도 하씨, 정씨, 최씨, 이씨, 박씨 등 마을의 다섯 문중을 대표하는 다섯 그루의 매화나무 ‘오매불망(五梅不忘)’은 기품이 높아 함부로 범접 못할 선비의 품성을 닮았다.

오매불망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하씨매는 수령이 670년 안팎. 원정매(元正梅)로 불리는 하씨매는 고려시대 문신인 원정공 하즙(1303∼1380)이 심은 매화나무로 퇴락한 토담을 배경으로 연분홍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빗방울이 보석처럼 주렁주렁 맺힌 원정매의 화사한 꽃잎은 어린 매화가 시기할 정도.

꼬부라진 줄기가 멋스런 원정매는 안타깝게도 몇 해 전 동사해 고사목이 됐다. 다행스럽게도 고매가 동사하기 몇 해 전에 밑둥치에서 나온 가지가 살아남아 탐스런 홍매화를 피우고 있다. 원정매 바로 옆에는 씨앗이 떨어져 뿌리를 내린 아들 매화도 예쁘게 자라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퇴락한 하씨고택에는 원정공이 살던 옛집이라는 의미로 대원군이 직접 쓴 ‘원정구려(元正舊廬)’ 당호가 걸려 있다. 집 뒤뜰에는 원정공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하연(1376∼1453)이 7세 때 심었다는 감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감나무의 수령은 630여년으로 요즘도 가을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린다.

하씨고택과 골목을 사이에 둔 정씨고택에는 수령 100년 가까운 정씨매 한 그루가 뜰을 지키고 있다. 투박한 질감과 부드러운 곡선이 돋보이는 긴 골목길 끝에 위치한 정씨고택은 매화나무를 비롯해 단풍나무, 배롱나무 등 희귀한 나무들이 많은 곳. 홍매화인 정씨매는 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만 사랑채인 선명당의 대청마루에 앉아 홍송 기둥 사이로 보는 매화가 가장 품위 있다. 정씨고택과 이웃한 사양정사는 정씨집안의 서재 겸 문중회 장소. 웅장한 지붕을 떠받치는 8개의 기둥은 한 그루의 기목나무에서 나왔다.

수령 230년인 최씨매는 최씨고가의 넓은 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최씨고가로 통하는 ‘ㄱ’자 골목은 남사예담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 최씨고가의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목련과 동백나무, 향나무가 홍매화 한 그루와 함께 고고한 기품을 자랑한다.

최씨매는 최씨고가의 사랑채에서 볼 때 가장 멋스럽다. 방문을 살짝 열면 홍매화 한 그루가 창호지에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사랑방 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달빛에 젖어 더욱 화사한 최씨매의 향기는 농염한 여인을 가까이 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씨 문중의 서재인 남호정사 뜰에 뿌리를 내린 이씨매는 오매불망 중 유일하게 백매화이다. 수령 100년 안팎인 이씨매는 기골이 장대한 장부를 닮았다. 남사예담촌의 매화 중 가장 키가 크고 가지도 무성해 뜰에서 보기보다 담장 밖에서 볼 때 더 품격이 높아 보인다.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담장 뒤로 이씨매와 함께 우뚝 솟은 나무는 이씨고가 입구에 위치한 회화나무.

남사예담촌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이씨고가 골목길. 30m에 불과한 이 골목이 유명해진 것은 X자 모양으로 굽은 300년 생 회화나무 두 그루가 만들어내는 신비함 때문이다. 허리 높이의 밑동까지 푸른 이끼에 뒤덮인 회화나무는 본래 화기를 막기 위해 심었다. 덕분에 미군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될 때도 이씨고가는 멀쩡했다고 한다.

이씨고가의 시조는 태조 이성계의 사위인 이재의 손자. 왕실과의 인연으로 인해 인조 때 궁궐 짓는 목수가 내려와 직접 이씨고가를 지었다고 한다. 집안에 뿌리를 내린 450년 생 회화나무는 인조로부터 하사받은 나무. 본래 이씨고가에는 400년생 홍매화 한 그루가 있었으나 20년 전에 고사해 지금은 남호정사의 백매화가 이씨매의 명예를 이어받았다.

오망불매 중 마지막 홍매화인 박씨매를 만나려면 남사예담촌에서 사수를 넘어 니구산 자락에 둥지를 튼 이사재를 올라야 한다. 이사재는 임꺽정의 난을 진압한 박호원의 재실로 백의종군 길에 나선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6월 1일 해질녘에 남사예담촌에 도착해 박호원의 농막에서 여장을 풀었다고 전해진다. 인근에 있었던 당시의 농막은 없어졌지만 대나무밭에 둘러싸인 이사재에는 역시 수령 100년 안팎의 홍매화 한 그루가 이사재의 기둥에 걸린 주련을 배경으로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산청에는 남사예담촌의 오매불망 외에도 기품 있는 매화나무가 몇 그루 더 있다. 덕산의 산천재 앞뜰에 뿌리를 내린 남명매는 남명 조식(1501∼1572)이 61세 되던 해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로 전해온다. 단성 단속사지의 정당매, 남사예담촌의 원정매와 함께 ‘산청 삼매’로 불리는 남명매의 수령은 450여년. 평생 벼슬과 담을 쌓았던 남명 선생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산천재를 세우면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벗을 삼았다고 전한다.

단성면 운리의 단속사 절터에 뿌리를 내린 정당매(政堂梅)의 수령은 640여년. 여말선초의 문신인 통정 강회백(1357∼1402) 선생이 어릴 적 수학하던 단속사에 심었다고 전한다. 강회백 선생의 벼슬이 정당문학 겸 대사헌에 올라 정당매로 불린다.

4개의 줄기로 이루어진 정당매는 높이 8m에 둘레가 1.5m로, 가지들이 휘어져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처럼 보인다. 3개의 줄기는 고사하고 1개의 줄기가 꽃망울을 맺는다. 정당매가 위치한 탑동마을의 논둑에는 수령 350년의 야매(野梅)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얼키설키 얽힌 가지에서 핀 매화가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삼아 더욱 화사하다.

매화향기가 그윽한 남사예담촌에는 하룻밤 묶어갈 수 있는 고택이 몇 곳 있다. 정씨 문중의 사양정사와 선명당(010-2079-8119), 그리고 이씨 문중의 이씨고택과 최근 산청군이 오픈한 한옥펜션 기산재(010-2987-9984)로 어둠 속에서 만나는 매화의 암향(暗香)이 더욱 그윽하다.

산청=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