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서신] 봄을 맞이하는 마음

입력 2012-04-04 18:34


봄의 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고 계신지요? 해가 바뀐 지 3개월이나 지났지만 이제야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설렘이 살랑거림은 새롭게 시작하는 봄의 찬란한 기운 때문일 것입니다. 새 교복을 입고 머슥거리면서 학교에 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봄이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살짝 한 발자국 내민 사회생활이 아직은 고되기만 할 새내기 직장인들의 발걸음도 봄입니다.

약국 창 앞에 화분 몇 개를 놓을 조그만 빈터가 있어 해마다 화분을 사서 들여 놓았지요. 봄철에는 파릇한 잎을 자랑하였고 여름이면 화사한 꽃을 맺어 약국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하였답니다. 지난 늦가을 무렵 며칠 아버지 병원나들이에 신경 쓰느라 돌보니 않았더니 갑자기 닥친 추위에 모두 얼어버렸답니다. 풀과 나무들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올해는 화분을 모두 정리하였지요. 길고 커다란 플라스틱 화분을 구입하여 흙을 다 한곳에 모으니 화분 네 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조그만 텃밭농사를 지으시는 분에게서 흙도 얻고, 상토도 얻어 포살포살하게 흙갈이를 하여 튼실한 화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약국 창 앞에 쪼르륵 나란히 놓인 화분에 드디어 상추씨를 뿌렸습니다. 동네꽃집에서 산 상추씨는 손톱 자른 찌꺼기 같은 모양이었지요. 신기했습니다. 애기 손바닥을 닮은 빨간 상추가 토종이라 고소하고 맛있다는 꽃집 민 집사의 적극 추천으로 한 종류의 씨만 사서 뿌렸습니다.

일주일쯤 지났는데 화분에는 별다른 기별이 없네요. 싹을 틔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아침저녁으로 화분을 들여다보며 말을 붙입니다. 작고 여린 몸으로 무거운 흙을 뚫고 나와야 하는 상추씨앗들에게 힘내라고 영치기 영차를 외치곤 하지요. 누군가 나를 응원해 준다면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도리어 제게 힘을 주고 있음을 봅니다.

이곳 미아리 집창촌에는 사채 일을 하는 이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용불량으로 인해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힘든 사람들에게 일수로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또 일일계라 하여 매일 돈을 붓고 각기 정한 때가 되면 목돈을 태워주기도 합니다. 돈을 갚다가 도망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떼먹힌 돈의 액수가 클 때는 일수 이모가 휘청거리거나 망하는 일도 가끔 보게 됩니다.

순자이모는 그런 일수 이모들 중에 가장 돈줄이 든든하다고 소문난 미아리 집창촌의 큰 전주입니다. 이곳에 정착한지도 삼십년이 넘었고 이모의 나이도 올해 칠십 줄에 접어들고 있으니 인생의 반 이상을 미아리 집창촌에서 보낸 셈이지요. 목소리가 어찌나 괄괄하고 크던지 안쪽 골목에서 싸움이 나도 이모가 끼면 제 약국까지 다 들립니다. 게다가 욕을 또 얼마나 잘하는지. 차마 듣고 있기가 민망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답니다. 세상에나 그런 이모가 교회를 다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순자이모가 언젠가 집 앞에서 전화로 채무자랑 말을 높이면서 큰 싸움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다 지켜본 옆집 아줌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며칠 뒤부터 옆집 아주머니의 마실이 시작되었는데 손에는 항상 집에서 만든 맛깔스런 반찬이 들려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평생 돈놀이만 하고 산 순자이모는 살림솜씨가 젬병이어서 그 맛있는 반찬에 무장해제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한동안 오고 가더니 하루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몸살기운이 있다는 핑계로 교회를 빠질라치면 쌍화탕과 약봉투를 챙겨든 아주머니의 정성 때문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교회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다니고 드디어 순자이모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두 주 전 약국에 들르셔서 한편으론 쑥스럽게, 한편으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순자이모와 또 이모를 전도했다는 그 분을 위해 준비한 예쁜 꽃다발을 두 분들께 드리면서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렸는지….

평생 돈 냄새와 거친 말로 삶을 가득 채운 순자이모에게 이제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사람으로서의 길이 환하게 빛나고 가득 차길 간절히 원합니다.

<서울 미아리 집창촌 입구 ‘건강한 약국’ 약사·하월곡동 한성교회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