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초원 복집

입력 2012-04-04 18:07

14대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둔 1992년 12월 15일 터진 ‘초원 복집’ 사건은 당시 여당을 긴장시켰다. 부산의 기관장 8명이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전 법무장관 주재 조찬 모임을 갖고 대선 전략을 논의한 내용이 폭로됐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부산시장, 부산지검장, 부산경찰청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지역 기무부대장과 부산시 교육감, 부산상공회의소 회장·부회장이 참석했다. 선거관련 기관장이 총집결한 셈이다.

공개된 대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김영삼(YS) 민자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야당 후보들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자는 모의였다. 대화록 가운데 “우리가 남이가” “(다른 사람이 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등은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됐다. 노골적인 관권 선거 기도이자, 권력 쟁취를 위한 지역 야합의 결정판이었다.

막판 악재에 몰린 여당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YS는 다음날 유세 직후 포항공항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당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최대 피해자는 나 자신”이라고 꼬리를 잘랐다. 박희태 민자당 대변인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목적이 결코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사건을 폭로한 국민당 정주영 후보 측이 사전에 모임을 알고 도청기를 설치해 수집한 것임을 노린 것이었다. 선거 결과는 YS의 승리였다. 악재는 오히려 영남지역과 보수세력의 표 결집을 불렀다.

2002년 16대 대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나라당은 후보등록 다음날인 11월 28일부터 김대중(DJ) 정권 시절 이뤄진 야당 인사 등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불법 도청 관련 문건들을 잇따라 폭로했다. 이회창 후보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DJ 정권을 “나라를 경영하는 기본이 안 된 사람들”이라고 맹비난했다. 2005년 국정원 자체 조사 발표에서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하지만 선거전에서는 ‘네거티브 전략’이란 비판의 역풍을 초래했다. 폭로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태 이미지를 이 후보 진영에 덧씌움으로써 그의 대세론이 뒤집힌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불법 사찰 문제가 막판 이슈로 부상했다. 아직 선거까지 6일이 남아있고 여야·청와대 공방이 계속되고 있어 파급 효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략적 목적만 노린 비방이나 자기논리에 매몰된 웃나간 주장들은 실체적 진실 여부와 다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최근 선거의 기억이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