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태정] 행복의 저울
입력 2012-04-03 18:16
퇴근길 서울역 광장에서 하늘을 올려보면 늘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날은 차곰차곰 토닥이고, 어떤 날은 쭈뼛쭈뼛 입에 쓴말을 늘어놓으며, 또 다른 날은 발그레하게 붉어져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렇게 위로를 받고 꾸지람도 들으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어 고맙다. 그래도 일상이 고단할 때는 사진첩을 불러내 행복의 나래를 편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장면으로 가득한 내 마음의 앨범 속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망막 위의 사진은 그랜드 캐니언이다. 미국 애리조나주 북부에 자리잡은 거대한 협곡으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 100대 자연경관’ 중 첫 번째로 꼽히는 곳이다. 20억년의 세월을 거치며 바람과 비와 햇살로 다듬어진 이 천연 조각품을 보면 누구든 신의 걸작품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에 이곳을 찾아 협곡을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 탄성과 함께 눈동자가 무한대로 확장되던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경비행기를 타고 명장면을 찍듯 눈으로 스캔해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고, 그때의 뜨겁던 감동은 가슴이라는 클라우드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 고민이나 어려움에 처할 때 그랜드 캐니언의 웅장한 모습을 떠올리면 세상사가 소소하게 비치고 곧장 대범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렇듯 자연은 풍경 하나만으로 고통을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두 번째는 번지점프 장면이다. 새처럼 날고 싶을 때, 자유를 느끼고 싶을 때 선택하는 번지점프는 잠시나마 중력의 법칙에서 나를 이탈시켜 줌으로써 행복감에 젖게 한다. 낙하를 하기 전에 시선 앞에 펼쳐지는 넓고 푸르른 하늘은 가슴을 열어주기에 충분하다. 하늘을 나는 시간은 황홀하다. 땅을 박차고 나갈 때는 두려움은 잠시뿐 허공에 자신을 던지면서 몸으로 큰 포물선을 그리다보면 세상을 온통 차지한 듯한 충만감을 준다.
좋은 건축도 나를 행복의 바다에 빠뜨린다. 나의 직장인 문화역서울만 해도 근대건축물로서 구조가 빼어날뿐더러 거기서 이뤄진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과 사연을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해진다. 생각은 꼬리를 물어 우리 역사(驛舍)와 비슷하다는 스위스 루체른 중앙역을 구경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우리 동네 역촌동의 옹기종기 낮은 주택도 정겹다. 고층빌딩의 수직적 삶의 형태보다는 서로 조근조근 나누고 대화하는 수평적 삶이 나아 보인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물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다.
그랜드 캐니언과 번지점프와 멋진 건축을 생각하니 행복의 저울 눈금이 확 올라갔다. 멀리 해외로 갈 것도 없다. 경주 황룡사지의 드넓은 벌판은 어떠며, 초록융단이 깔린 듯한 보성차밭, 시원(始原)의 흔적을 간직한 벌교의 시꺼먼 뻘밭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풍경이다. 이렇듯 아직도 꺼내 볼 사진이 많다는 데 안도하고, 하늘과 대화하면서 행복을 찾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이 가벼워서 더욱 좋다.
안태정 문화역서울284 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