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신의 언어, 인간의 언어

입력 2012-04-02 18:13


오래 전 일이다. 당시 우리사회에 자살사건들이 급증해 이 분야 전문가들이 대응책 마련에 머리를 맞대던 때였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모 부대에서 지휘관급 장교들이 모여 자살예방교육을 실시하는데 한 꼭지 특강을 의뢰하는 전화였다. 아무리 바쁜 스케줄이 있어도 군에서의 부탁은 거절 못하는 것이 한국남성들의 군 콤플렉스 일 것이다.

평소처럼 준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 부대 교육장에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랐다. 보통 장교들이 아닌 스타급 장교들 수십 명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주 엄숙하고 진지하게. 평소 얼굴 두껍기로 소문난 나도 그 분위기에 그만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 날 강의 초반 어찌나 강의가 안 풀리던지. 할 수 없이 내 마음 속 깊은 비밀을 고백하고 말았다. “제가 방위 출신이라 여러 장군님들 앞에서 강의하기가 좀 거시기 하네요...” 이 고백 후 강연장 분위기는 돌변하고 화기애매(?) 해져서 무사히 강의를 마친 경험이 있다.

그 날 밤 나는 한 꿈을 꾸었다. 수업시간에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학생들 자리에 모두 군복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 아닌가. 강의실을 잘못 들어왔나 해서 자세히 보니 우리 학생들이 맞았다. 그런데 모두가 군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았는데 웬걸, 다들 별들을 달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놈의 예비역 방위 콤플렉스가 또 작동을 했는지 황당했다. 거의 식은땀을 흘리며 꿈을 깬 후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내 무의식이 수십 년이 지난 아직도 군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는 생각과 함께 번뜩 머리를 스치는 것은 우리 학생들이 달고 있던 계급장의 의미였다. 그 아이들이 장군님들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가슴속 별들을 계급장으로 달고 앉아있던 장군님들. 나는 이 꿈을 꾼 후 학생들을 보는 내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내가 모셔야 될 장군님들이 지금 내 앞에 계시다. 이렇게 내 태도가 바뀌고 난 후, 학생들도 자연히 나에게 마음을 열고 허물없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이 체험을 통해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면 상대방의 언어를 배우고 존중하며 다가서야 한다는, 가장 간단한 인간관계의 상식을 새롭게 깨달았다. “살다가 새 언어를 배우게 되면, 그것이 또 다른 수행이 될 수도 있다.” 분석심리학자인 로버트 존슨의 말이다. 이 말대로 나는 내 꿈의 언어를 통해 내가 이제껏 몰랐던 관계의 언어를 새로 배우게 되는 또 다른 수행을 해 본 느낌이었다.

고난주간을 맞았다. 인간으로 오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밑바닥 언어인 고난을 살아내는 주간이다. 하나님이 인간 예수로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영원히 시간 속으로 오신 사건이다. 신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려고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몸을 입은 사건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인간 언어의 가장 극단인 고난의 길을 스스로 가신다. 신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며 인간의 언어 중 가장 마지막 장, 가장 바닥의 언어인 고난의 언어로 새 언어를 배우는 사건. 신이 인간의 언어를 배우려 스스로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 인간들은 신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언어, 자신을 내려놓는 겸손의 언어, 모두를 포용하는 수용의 언어.

언젠가 헨리 나우웬의 ‘내리막길에서 만난 예수’라는 글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체험한 적이 있다. 잘 알듯이 나우웬은 자기 커리어의 정점에서 하버드 대학 신학부의 정교수직을 버리고 한 정박아 보호시설의 자원 봉사자로 들어가기 위한 결단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그 책에서 고백한다. “나는 그 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작은 인기, 작은 권력의 오르막길 만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박약아 아담군 곁에 앉았을 때 이런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해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오르막길은 늘 성공과 칭찬에 가려 있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 내리막길에서 복음서의 진정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리막 인생길을 걷고자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서이다.” 고난주간, 이 한 주 동안만이라도 우리가 이제껏 살아보지 못한 언어를 써보면 어떨까.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