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버마의 봄
입력 2012-04-02 22:02
버마의 겨울은 혹독하고 길었다. 봄이 오는가 하면 더 추운 겨울이 찾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1885년 이후 영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버마는 2차대전 후 다시 영국 치하에 들어갔다. 버마 독립의 아버지 아웅산이 영국과 협정을 맺어 1948년 1월 4일 독립했지만 아웅산은 6개월 전 암살당했다. 60년대까지 풍부한 자원으로 동남아 최부국 중 하나였던 버마는 소수종족과 공산세력의 발호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62년 3월 네윈이 사회주의 쿠데타를 일으켜 59년간 군부 독재가 계속됐다. 네윈의 고립주의가 부른 경제 파탄으로 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항쟁’이 일어났고 아웅산의 딸인 수치 여사가 그 중심에 섰다. 수천명이 희생된 끝에 네윈이 사퇴했으나 소 마웅 장군의 신군부가 그해 9월 정권을 장악하면서 짧은 봄은 끝났다.
현 정권과 관계설정 딜레마
신군부 쿠데타 직후 수치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민주동맹(NDL)은 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군부는 의회 소집을 거부했다. 수치 여사는 89년 7월부터 가택연금에 처해져 15년간 영어(囹圄)의 생활을 했다. 그는 99년 영국에서 암으로 숨진 남편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2005년 군부 온건파가 발표한 민주화 일정에 따라 2008년 신헌법에 대한 투표가 가결됐고 수치가 철저히 배제된 가운데 2010년 총선이 실시됐다. 수치의 가택연금은 그해 11월 해제됐다. 3성 장군 출신으로 전역한 테인 세인 대통령이 지난해 3월 정권을 넘겨받은 뒤 보다 폭넓은 민주화 조치를 내놓았다. 민주 인사들을 해금하고 10개 소수민족 반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수치 여사는 1일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피선거권을 인정받아 출마했다. 공식 발표는 남아있지만 현 정부가 그의 당선을 무화시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비록 45석을 뽑는 작은 선거였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린 셈이다.
제도권 진입으로 수치 여사는 혁명이나 내전을 거친 중동 국가들과는 다른 과제를 안게 됐다. 군부의 기반인 현행 헌법질서를 유지하면서 서방의 제재 해제를 도모함으로써 정권을 연착륙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 현 테인 정권과의 관계 설정 문제다. 이는 수치 여사에겐 딜레마가 될 수 있다. 현 정권과의 연대는 개혁의 동력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변혁의 강력한 장애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섣부른 화해는 24년 민주화 운동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 이번 선거 출마만 해도 군부 주도의 2008년 헌정 체제를 승인하고 면죄부를 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반면 제도권 진입은 2015년 대선 출마와 정권 창출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우리 민주화 과정 연상시켜
수치 여사는 버마의 상·하·지방 의회 1160석 가운데 25%를 군부가 임명토록 돼있는 왜곡된 헌법질서를 바로잡는 개헌 문제에서부터 군부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보다 큰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는 60년 해묵은 소수민족 문제는 또 다른 과제로 남아있다.
그녀 앞에 놓인 선택은 80·90년대 신군부 정권이 퇴장하던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연상시킨다. ‘야합’이란 비판을 받았던 3당 합당 이후 군부를 정리하고 개혁조치를 시행했던 김영삼 정권, 야당의 길을 걸으며 선거를 통해 힘을 키워 정권교체를 이뤘던 김대중 정권의 길. 세세한 차이를 단순화하면 버마 앞엔 크게 두 방향의 선택이 열려있다. 수치 여사에겐 제3의 길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큰 틀과 각론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버마의 봄을 열어갈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민주화를 지난한 투쟁 끝에 쟁취한 우리 국민에게 지금의 버마 풍경은 낯설지 않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