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복장 논쟁의 불을 지핀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 존 후퍼 (中)

입력 2012-04-02 18:12


가톨릭 내 수도원 개혁 공감하다가 불링거 영향받고 개신교로…

존 후퍼는 1495년경 영국 서머셋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때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자신의 출생과 이력에 대해 밝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위스 종교개혁 지도자 하인리히 불링거(H. Bullinger, 1504∼1575)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외아들로 아버지의 유산 상속자였으며, 개혁 종교를 채택했을 때 유산을 박탈당할까 봐 두려워했다는 정도로만 언급하고 있다.

그는 1518년에 옥스퍼드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시토 수도회의 백의 수사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피의 메리 시절 가드너 주교는 그를 화형에 처하는 재판문에서 그에 대해 “한때 시토회의 백의 수도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토회는 1098년에 프랑스 부르고뉴의 모렘 지역 베네딕트 수도원장 로베르투스가 디종 남쪽 시토(Citeaux)에 창립한 수도회이다. 시토회는 일종의 가톨릭 내 수도원 개혁 운동이었다. 제3대 원장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은 1119년 회칙 ‘사랑의 헌장(Charta Cartatis)’을 기초해 교황 칼리스토 2세(Callistus Ⅱ)에게서 새로운 수도원으로 인가받았다. 시토회에 속한 개개의 수도원은 자치권을 가졌다. 수도사들은 단식과 침묵 생활을 했다. 봉토에서 나오는 수입을 거부하고 스스로 토지 경작과 노동을 통해 검소한 생활을 해나갔다. 사람들은 수도회의 수도사를 보고 이렇게 평가할 정도였다. “그들은 천사보다는 조금 부족해 보였지만, 인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클레르보 수도원에 대한 생 티에리의 기욤의 묘사, 1143년경)

시토 수도회는 유럽에서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2세기 말부터 많은 수도원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회칙을 따르지 않아 성격이 변질되었다. 시토회에 속한 수도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이후 북유럽에서 사라졌다.

존 후퍼도 처음에는 이와 같은 수도회의 이상에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토 수도회의 백의 수사로 생활하던 중 수도원이 해체되자 옥스퍼드로 되돌아 왔다. 그 당시 이미 그는 독일에서 수입된 책들을 통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대해 열광했다. 그는 종교개혁 사상을 열심히 전파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로서의 삶은 고단한 것이었다. 투옥과 처형의 위협을 받으며 영국과 대륙으로 수시로 도망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교 가드너 후퍼에 의심 눈초리

1539년에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과 타협하기 위해 ‘6개 신조’를 공포하였다. 로마 가톨릭 냄새가 물씬 났다. 이전 제도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 신조에 저항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화형에 처했다. 후퍼는 옥스퍼드를 떠나 가톨릭교도 토머스 아룬델 경의 집사로 얼마 동안 지냈다. 이때 그는 우연하게 츠빙글리의 몇 작품과 불링거의 바울 서한 주석을 접하게 된다. 특히 불링거의 작품은 그가 개신교 신앙으로 돌아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후퍼는 불링거와의 몇 차례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의 양심에 반해 기존 종교를 따르는 것이 적법한 것인지를 놓고 논의를 했다.

아룬델 경은 후퍼의 인격을 높이 샀지만, 그의 개신교 신앙관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의 사냥꾼으로 악명 높은 주교 스테판 가드너는 후퍼의 신앙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고, 아룬델 경에게도 조심할 것을 경고했다. 후퍼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그는 아룬델 경의 집을 떠나 파리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얼마 지내지 못하고 다시 영국 서머셋으로 돌아와 아룬델의 조카인 존 세인트 로우 경에게 잠시 고용되어 일을 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박해와 위협이 계속되자 또 다시 영국을 떠나야만 했다. 1544년경에 선원으로 위장해 보트 한 척을 빌려 대륙으로 건너갔다. 우선 프랑스로 간 다음, 북부 독일을 거쳐 1546년에 슈말칼덴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다.

스트라스부르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의 지도 하에 있었던 종교개혁 도시였다. 부처는 온건하고 화합적인 인물로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칼뱅도 한때 이곳에 와서 부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후퍼가 도착했을 때에는 카알 5세 군대가 이미 스트라스부르를 함락시켜 종교개혁 운동이 위기를 맞았다. 스트라스부르는 위기였지만 후퍼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가 왔다. 이곳에서 그는 벨기에 출신의 여인과 1547년에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하인리히 불링거가 있는 취리히로 영구히 이주할 결심을 하였다.

그는 바젤을 거쳐 취리히에 도착했다. 불링거는 취리히에 도착한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사망 이후 취리히를 대표하는 종교개혁의 지도자였다. 츠빙글리는 카펠 전투에서 가톨릭 진영에 패배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 후 체결된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은 가톨릭교회에 속한 주에서는 개신교식 예배를 금지했고, 개신교 도시에서는 가톨릭교회의 포교 활동이 허용되었다.

종교개혁 도시 취리히에서도 가톨릭교의 포교가 허용되었지만, 취리히 시민들은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불링거가 설교자로 활동했던 브렘가르텐에서는 개신교식 예배와 설교가 금지되었다. 그는 브렘가르텐을 떠나 취리히로 갔다. 취리히의 시민들은 그를 일요 설교에 초대했다. 그가 설교하러 올라선 연단은 마침 츠빙글리가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치 츠빙글리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 그 설교를 들은 종교개혁가 오스발트 미코니우스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그의 설교는 마치 수많은 천둥이 치는 것과 같았다. 츠빙글리가 죽지 않았고 불사조처럼 부활한 것 같았다.”

‘죽느냐 사느냐’ 문제가 기다려

불링거는 1531년 12월에 27세의 나이에 츠빙글리의 후계자가 되어 취리히 교회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스위스를 신앙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스위스 신앙고백을 만들고 설교 운동을 통해 교회개혁을 주도했다. 후퍼는 취리히에서 불링거와 교제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제복 착용에 대한 완강한 거부는 불링거의 영향이었다. 그는 불링거를 통해 사제복의 착용이 가톨릭의 사제주의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취리히에서 안정을 찾은 그는 ‘그리스도의 선포와 그의 공직’(1547), ‘거룩한 십계명의 선포’ (1548) 등의 책을 집필해 출간했다.

불링거는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종교개혁가였다. 헨리 8세 시절 그리고 피의 메리 시절 종교 박해 때문에 영국을 떠나 취리히로 온 영국의 난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또 종교 박해가 끝나고 영국의 난민들이 귀국할 때 고마운 불링거의 책들을 가져가 영국에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550년에서 1560년까지 영국에서 불링거의 설교집 ‘열 가지 설교들(Decades)’은 77쇄를 찍었고, 그의 가정생활서는 137쇄를 찍었다. 이 시기에 영어로 출간된 칼뱅의 책은 2쇄밖에 나가지 못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후퍼의 영향도 컸다. 에드워드 6세 시절 영국으로 귀국한 후퍼는 불링거의 종교개혁 사상을 틈 있을 때마다 전파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죽고, 1547년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승계했다. 후퍼에게도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1549년 5월경 후퍼는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이자 호국경인 에드워드 세이모어의 종군목사가 되었다. 에드워드 6세는 뛰어난 설교자인 후퍼를 글로스터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전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투옥까지 각오하며 주교복 착용을 거부하여 복장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개혁 진영의 분열을 우려해 그는 임직할 때에 한번만 복장을 착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 글로스터의 주교로 봉해졌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더 커다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복장을 착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삶을 온전히 내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