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고난, 영광, 비상

입력 2012-04-02 18:13


고난 주간을 맞았다. 초대 교회 신앙은 고난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당연한 기쁨으로 여긴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사도 바울, 로마의 카타콤과 갑바도기아에 살았던 사람들, 폴리캅, 이그나티우스 같은 교부들도 스스로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며 주님 앞에서 고난 받는 것을 영광과 즐거움으로 여겼다. 칼뱅도 고난과 결부된 경건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현대교회와 성도들은 고난 자체를 싫어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러면서 언제부턴가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이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관례적인 행사로 보내는 경향이 있다. 한 마디로 고난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으려는 특징이 있다. 한국교회도 과거에는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우리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 지금 안티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교회를 향해 핍박보다 더 무서운 빈정거림과 조롱을 하고 있는가. 특별히 4월 29일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레이디 가가 콘서트는 가룟 유다를 칭송하고 동성연애를 찬성할 뿐만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퍼포먼스나 음란한 쇼를 자행할 것이다. 그 콘서트는 한국교회 최악의 고난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난을 싫어하니까 하나님께서 억지로라도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첫째, 고난을 영광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고난을 다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신앙의 마인드로 볼 때 주님을 위한 고난과 수난은 최대의 영광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둘째,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어느 일간지 신문에서는 이 시대를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직장을 잃은 시대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가 아픔을 공감하고 소통하며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나눠야 한다.

셋째,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선용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의미 없는 고난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난을 잘 선용만 하면 더 큰 영광과 전화위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 고난주간을 맞아 고난 앞에서 더 낮아지고 기도하며 고난을 영광으로 삼는 지혜를 갖자. 그럴 때 고난은 내일의 눈부신 영광으로 승화되고 우리 신앙의 성숙한 진보와 비상을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