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를 박차고 나간 회화, 건물 벽·통로를 점령하다… ‘설치 회화’ 작가 이상남 방한
입력 2012-04-01 17:32
‘설치 회화’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는지. 그림이되 액자에 넣어두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일부로 벽면이나 통로 등에 설치하는 작품을 말한다.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이상남(58) 작가는 국내 ‘설치 회화’를 개척한 주인공이다.
2006년 서울 역삼동 LIG손해보험 본사 사옥에 대형 그림을 설치한 그는 2010년 경기도 안산의 경기도미술관에 국내 최대 규모의 벽화(길이 46m)를 설치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에는 경남 사천의 LIG손해보험 연수원에 36m짜리 초대형 회화를 설치하기도 했다.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어 호평 받은 그는 얼마 전 뉴욕에서 열린 국제 미술축제인 ‘아모리쇼’에 출품, 월스트리트저널이 메인 기사로 보도하는 등 눈길을 끌었다. 이어 오는 9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열리는 제3회 미디에이션(Mediation) 비엔날레의 전시 작가로 선정됐다.
백남준과 이우환 등에 이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하고 있는 그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왔다. 최근 여의도에서 만난 그는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을 알렸다고 생각하지만 유럽에서 전시를 여는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설레고 기대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30년째 활동 중인 그의 작업 주제는 ‘풍경의 알고리듬’이다. 서구 모더니즘의 기하하적 추상미학과 역동성·순환성·비결정성 등의 동양적 개념을 아우르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과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한다. 마치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낸 것 같은 이미지들은 그러나 전통 옻칠과 아크릴로 칠한 캔버스나 패널 위에 겹겹이 층을 쌓는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공간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축적된 생각과 아이디어로 생성된 이미지들은 ‘1㎜의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섬세하고 정교하다.
그의 작품은 첨단 기기의 복잡한 시스템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음표로 그려낸 선율 같기도 하다. 우주선 모형 또는 수학 기호를 떠올리게도 한다. 작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합리와 비합리,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샛길을 걷는다. 바람이 불면 영혼을 느끼듯 내 그림 또한 영혼을 불러내길 원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감이 떠오르면 작은 메모지에 깨알같이 쓰기도 하고, 일기장이나 수첩에 적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실은 메모지 일기장 수첩 등으로 가득하다. 회화는 인문학과 같아서 기초가 중요한데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작업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한 번의 붓질과 100번의 붓질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수없이 칠하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이를 “작품을 만나는 긴 여정”이라고 설명했다.
폴란드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현지 조사를 거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구상하겠지만 공간에 대해 계속 연구하고 쉼 없이 붓질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회화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폴란드 전시 후에는 10월 서울 청담동 PKM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