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3)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입력 2012-04-01 18:05
그의 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예수님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았다
역사상 가장 예수님과 닮았다는 성 프란체스코를 만날 수 있을까?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러 가는 날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들은 프란체스코에 관한 설교만도 책 몇 권은 되리라.
떠나기 전 프란체스코의 전기 작가 톰마소 디 첼라노가 묘사한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다시 머리에 입력했다. “약간 작은 키에 가지런한 둥근 머리, 갸름하고 진취적인 얼굴, 평평하고 작은 이마, 보통 크기의 검은 눈, 곧은 눈썹, 얇고 곧은 코, 귀는 곧으나 작으며 평평한 관자놀이, 온화한 말투, 달콤하고 다부지며 낭랑한 목소리, 희고 가지런한 이, 작고 얇은 입술, 검고 드문드문 난 턱수염, 곧은 어깨, 가느다란 손, 긴 손가락, 불쑥 나온 손톱, 홀쭉한 허리, 작은 발, 섬세한 피부, 허름한 의복, 단잠, 고귀한 손, 우수한 겸손.”
멀리 버스 밖으로 아시시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거룩에의 본능일까? 멀리 보이는 수비오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아시시 마을. 저 마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났다니….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도착하자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프레스코화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중세풍의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고 그 앞에는 가슴이 탁 트이는 움부리아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이 유난히도 가까운 마을, 그 분위기는 마치 갈릴리 같고 나사렛 같았다.
좋은 영성은 좋은 환경에서 나오는가? 성당 안에는 작은 집 안에 누워 있는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 주변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지오토, 치마부에, 로렌체티, 마르티니 등의 그림이 위대한 삶을 산 프란체스코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프란체스코는 1181(1182)년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십자군 병사를 꿈꾸던 그는 어느 날 산 다미아노 성당의 제단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체스코, 너는 가서 무너진 나의 집을 수축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얼마 후 육체로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다. 어느 날 그가 말을 타고 가는데 나병환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가난한 시대, 유난히도 나병환자가 많았다. 보통 때 같으면 스쳐갔을 프란체스코는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먼 훗날 그는 ‘유언(Testament)’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죄인인 내가 그 나병환자를 보았을 때 나는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그들 가운데 있게 하셨고 그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껴안고 돌아섰을 때 나의 비통한 마음은 영혼과 몸의 달콤함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 4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프란체스코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삶을 살았다.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가난(청빈), 겸손, 복음적 선교, 사랑, 십자가, 성령의 이끌림, 우주적 형제애 등으로 다양하게 말하지만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이것이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이다.
에릭 도일은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을 ‘unconditional love for Christ(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리처드 포스터는 성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은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실제로 그렇게 살아간 것이라고 말한다. 윌리엄 쇼트는 ‘거울론’으로 설명한다. 프란체스코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는 데서 왔다는 것이다(고후 3:18). 하나님을 거울로 비춰보면 그리스도가 있고 만물을 거울로 비춰보면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만물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물을 본다.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산다. 그에 의하면 프란체스코의 영성은 이렇게 요약된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보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라.”
성 프란체스코는 일생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할 뿐 아니라 아예 가난 자체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위해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 그가 가난했던 것은 그리스도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눅 9:3),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이 세 본문이 프란체스코 가난의 성경적 기초다. 따라서 그의 가난은 해방신학적 가난이 아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회적 가난이 아니라 복음적 가난이었다.
프란체스코는 교회를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수축하라는 음성을 듣고 세 교회를 수리했다. 성 다미아노 교회, 포르티운쿨라 교회 그리고 성 피에트로 교회이다. 그는 종종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를 떠난 교회사의 다른 인물들처럼 한 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교회와의 단절은 곧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매일 죽고 세상의 악으로부터 매일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성육신적 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순종해야 한다.
그가 쓴 ‘유언’의 한 부분이다. “형제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거룩한 성녀인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 또한 거룩한 어머니 교회와 그 종(성직자)들에게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
프란체스코는 또한 사람과 자연을 사랑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육체적 영적으로 유사한 존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다. 이 믿음이 프란체스코를 좁고 어두운 수도원에서 끌어내어 세계를 수도원으로 만든 힘이다(리처드 포스터). 선교는 이러한 신앙고백의 자연스런 결과로 나타났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생애 동안 이슬람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도했다. 그리고 1314년에는 프란체스칸 선교사들이 당시만 해도 지구의 끝이었던 중국을 향해 선교를 떠났다.
반제도적이며 반권위적인 개인주의, 어지러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프란체스코 영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을 회복하고 무너진 교회를 수축할 것인가? 프란체스코의 말대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소원하지 말고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오직 한 분 거룩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부로 삼아야 한다(수도회규칙·1209).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