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6) 신사참배 반대 운동
입력 2012-04-01 18:04
‘예비검속’ 악법으로 참배 거부자 구금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신사참배 반대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신사참배가 가결된 이상 이를 거부하는 것은 장로교 총회의 결의에 저항하는 행위였다. 흔히 교회 회의를 성회(聖會)라며 성(聖)노회, 성(聖)총회라고 말하지만 지상의 어떤 교회 회의도 무오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교회정치원리 제1조에서는 잘못된 결정에 저항 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 곧 말씀에 위배되는 명령이나 교리를 거부할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는 이를 강요할 때부터 있었으나 개인적인 차원의 반대였다. 그러나 1938년 이후 반대운동이 조직화되었다. 이 운동은 두 가지 유형으로 전개되었는데 첫째는 일본 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나 기관에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진정하는 방법이다. 이를 김양선은 ‘합법적 방법’이라고 불렀다.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이 박관준(朴寬俊) 장로와 김선두(金善斗) 목사였다.
박 장로는 1935년 이래 수차례 평남지사 니시모토(西本), 문부장관 아라기(荒木),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에게 진정서를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우가키와 미나미 총독에게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권고하기 위해 13번이나 총독부를 방문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9년 2월에는 보성여학교 음악교사 출신인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정계의 유력인사를 면담하고 신사참배 강요를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하려했으나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자 1939년 3월 24일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74회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잠입하여 심사참배강요의 실상과 부당성을 지적한 진정서를 투척하여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즉석에서 검거된 이들은 조사를 받았다. 박관준은 32일간 경시청에 구금되어 있다가 평양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6년간 투옥되어 있던 중 병을 얻어 순교하였다. .
장로교 제5회 총회장(1918-1919)을 역임한 김선두(金善斗·1876∼1949) 목사도 일본 유학생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일본 정계 요로에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진정하기위해 1938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정계와 군부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고 한국에 돌아와 장로회 총회에서의 강제적인 신사참배결의를 막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져 김두영 목사는 사전에 구속되고, 경찰의 압력에 굴복한 장로교 총회도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지만 이런 일들이 합법적인 반대운동에 속한다.
신사참배 반대의 두 번째 유형은 조직적인 불참배운동이었다. 개인의 힘은 미약하기 때문에 조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운동은 개인적인 접촉이나 비밀 집회를 통해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고지하고 불참배를 권유하는 운동이었다.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지역적으로 볼 때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宣), 평안남도의 주기철,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만주의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가 중심인물이었다. 반대운동이 일어난 대표적인 지역이 평안도와 경상남도였는데 평안도의 경우 고흥봉 김린희 김창인 김화준 박관준 박신근 서정환 안이숙 채정민 최봉석 등이, 경상남도의 경우 김두석 손명복 염애나 이현속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최상림 등이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세 가지 이유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숭배 행위라는 이유였다. 동시에 이것은 개인의 신앙양심과 신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이었고, 또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 출석을 거부하고 가정 예배를 권장하였고, 신사불참배자들 만의 모임을 추진하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경남지방 신사참배거부자들의 실행사항은 다음과 같다. ‘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말 것,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 받지 말 것,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 십일조나 연보하지 말 것, 신사불참배자들끼리 모여 예배하되 가정예배에 주력할 것.’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식민정책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들을 검거 투옥시켰다. 1940년 7월부터는 ‘일제검거’라는 이름으로 모든 반대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된 이들은 전국적으로 2000명에 달했다. 이들 중 50여명이 옥중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파악된 이는 강종근 권원호 김윤섭 김윤점 김이준 김지봉 김창옥 김하석 박관준 박봉진 박연세 박이흠 서성희 안영애 양용근 이기풍 이변주 이병규 이우식 이용희 이춘관 이현속 전치규 정태희 주기철 조용학 최봉석 최상림 최인규 최태현 허성도 등 31인이다.
해방과 함께 마지막으로 출옥한 이들이 20여명으로 평양감옥에서 17명이 출옥했다. 고흥봉 김화준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오윤선 이기선 이인재 주남고 조수옥 최덕지 한상동 김형락 박신근 장두희 양대록 안이숙 이광록 등이다. 그 외에도 대구형무소에서 김두석 김야모 이술연, 광주에서 손양원 등이 석방되었다.
이들은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체포되었는데, 예비검속이란 1925년 제국의회에 의해 제정된 치안유지법에 근거한 예방구금제도였다. 이것은 범죄 사실이 없어도 범죄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체포, 구금할 수 있는 악법이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불경죄, 보안법 위반, 육군형법 위반 등이었다.
이들에 대한 평양지방법원의 ‘예심종결서’가 남아 있어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전개과정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거나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지원한 이들이 없지 않았다. 평양의 함일돈(F E Hamilton)과 마두원(D R Malsbury), 만주의 한부선(Bruce F Hunt), 경남의 마라연(Dr C. McLaren), 태매시(Miss Tate)등이 그러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