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사찰 문건 파문] 문건에 ‘BH(청와대) 하명’ 문구… 靑 개입 의혹

입력 2012-03-30 22:00

공직자는 물론 언론계·재벌총수·금융계 인사까지 전방위 사찰

국무총리실의 불법사찰 문건은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개입됐다는 정황을 보여준다. 공직자, 공기업 임원에 대해 직무감찰 범위를 넘어 사생활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벌총수, 언론계, 금융계 주요 인사 등 민간인도 전방위로 사찰했음을 알 수 있다. 파장이 커지고 있어 검찰 수사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주목된다.

◇불법사찰 전반 수사 불가피=검찰은 2010년 수사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한 조사관이 USB에 저장한 보고서를 압수하고, 삭제된 일부 자료를 복구해 2619건의 불법사찰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와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 사찰만 수사하고, 나머지는 수사결과 발표나 재판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은폐·축소 수사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검찰은 당초 증거인멸 규명에 주력한다는 방침이었지만 불법사찰 전반에 대한 재수사가 불가피해졌다. 검찰은 30일 ‘KBS 노조 발표자료에 대한 입장’을 통해 “종전 수사에서 내사종결한 부분은 주로 정관계, 공직, 사회동향 등을 정리한 내용이거나 공직윤리지원관실 직무범위 내 활동이어서 범죄구성요건을 충족하지 않았다”며 “전체적으로 다시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이 검찰 소환에 불응하고 날짜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불법사찰 보고서 공개에 따른 수사확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분석된다. 당초 증거인멸 지시 의혹에 대해서만 검찰에서 해명하려고 했던 그의 전략에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관계기관과 대책을 논의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방위 불법 사찰 실태=불법사찰 문건은 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2008~2010년 벌인 사찰활동 보고를 담고 있다. 3000여쪽의 방대한 양 가운데 일부만 공개됐다.

문건에 따르면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고위 공직자에 대한 감찰보고, 장·차관 복무동향 기록과 함께 조현오 경찰청장, 어청수·강희락 전 경찰청장 등의 업무능력과 비위 의혹을 조사했다. 경찰 내부망에 비판적인 글을 올린 하위직 경찰에 대한 동향파악도 이뤄졌다. 전·현직 경찰 모임인 무궁화클럽에 대한 사찰문건은 150건이나 됐다. 충남 홀대론을 제기하며 정권과 각을 세웠던 이완구 당시 충남도지사, 새누리당 이상득 의원에게 반기를 든 정태근 의원은 물론 정 의원과 만난 개인사업가 박모씨도 사찰 대상이었다. 서울의 작은 산부인과 이름도 문건에 올라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강정원 전 KB국민은행장,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삼성비자금 수사 이후 설립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 화물연대, 현대차 전주공장 노조 등도 감시했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대통령 패러디 그림을 병원에 붙였던 서울대병원 노조 등 촛불집회와 4대강 관련 사찰도 이뤄졌다.

이세웅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노무현 정권 때 임명된 공기업 임원도 주요 타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2009년 8월 작성된 ‘KBS, YTN, MBC 임원진 교체방향 보고’에는 ‘BH(청와대) 하명’이라는 문구가 있어 청와대가 지시해 보고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5월 19일 사정기관의 한 고위 간부 사찰 문건에는 불륜행적이 분(分) 단위로 기록돼 있다. 이 간부가 내연녀와 같이 간 장소와 시간, 표정은 물론 어떤 말을 했는지도 상세히 묘사돼 있다. 이 간부는 사찰결과가 보고된 지 2개월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