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를 균형 잡아주는 흔적과 얼룩들… ‘기울어짐에 대하여’
입력 2012-03-30 18:18
문숙 시집 ‘기울어짐에 대하여’
“내려놓으면 그만인 줄 알았다/ 들어낸 자리에 그림자가 남았다/ 내 가슴팍에 걸려 있던 시간만큼 선명하다/ 두고두고 환할 것만 같던 때가 있었다/ 자꾸 바라보는 동안 나는 검게 얼룩지고/ 너는 이발소그림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바라보는 법을 알지 못해 못자국이 깊다/ 네가 없는 빈자리로 자꾸 마음이 무너진다/ 나를 없애기 전에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액자를 떼어내며’ 부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삶의 자취는 얼룩처럼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액자를 떼어낸 하얀 자국에 의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문숙(51·사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는 흔적과 얼룩의 의미를 묻는 방식이 돋보인다. “너를 사랑하는 일이/ 떫은맛을 버려야 하는 일이네/ 물렁해져 중심마저 버려야 하는 일이네/ (중략)/ 겉은 두고 속만 허물어야 하는 일이네/ 붉은 울음을 안으로 쟁이는 일이네/ 사랑이란/ 일생 심지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일이네/ 결국 내 허기진 속을 나로 채우는 일이네”(‘홍시’ 부분)
‘나를 없애기 전에는 지울 수 없다’거나 ‘허기진 속을 나로 채우는’에서 알 수 있듯 문숙의 ‘나’는 도처에서 출몰한다. 그건 ‘나’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제가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인과론적 인식에 다름 아니다. ‘액자’라든가 ‘홍시’는 명목상 시의 주제일 뿐, 그 내부엔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나’라는 존재가 숨어 있다. 그리고 거개의 시편들은 1인칭의 개입으로 종결된다.
“어쭙잖은 여동생을 위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던 오빠/ 그날은 눈물범벅이 된 채 밤새 몸을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냈다/ 착한 오빠는 내게 그런 모습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면 욱신거리는 제 뿌리를 들여다보며 다독였을 날들을/ 그때 나는 내 길만을 가느라 알지 못했다”(‘가로수’ 부분)
문숙 시에 등장하는 얼룩과 흔적은 현재의 ‘나’에 대해 균형을 잡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힘을 참회의 방식으로 드러내 보이는 게 이번 시집의 특징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