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미학적 유전자를 준 예술가들… ‘만남’

입력 2012-03-30 18:17


밀란 쿤데라 신작 에세이 ‘만남’

“무엇을 통해 내 고국이 내 미학적 유전자에 영속적으로 각인되었는지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야나체크의 음악을 통해서라고. 거기에는 전기적인 우연이 큰 역할을 했다”(179쪽)

1929년 체코의 브륀에서 야나체크 음악원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1975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작가 밀란 쿤데라(83)가 에세이집 ‘만남’(민음사)에서 언급한 야나체크는 쿤데라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사망한 체코의 저명한 작곡가이다. 젊은 피아니스트이자 야나체크 이름을 딴 음악원 교수였던 쿤데라의 아버지는 야나체크에 매혹된 연구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유년 시절부터 매일 아버지나 아버지의 제자들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야나체크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쿤데라는 침울했던 소련 점령 시절인 1971년,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면서 조문객들에게 일체의 담화를 금지시킨 채 네 명의 연주자로 하여금 야나체크의 두 번째 현악4중주곡을 연주시켰다. 쿤데라에 따르면 야나체크는 인간의 노쇠, 추함, 우스꽝스러운 면을 음악으로 훌륭하게 환원한 작곡가이다.

에세이집 ‘만남’은 쿤데라가 자신의 인생에 잊지 못할 섬광을 남긴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을 깊은 성찰로 꿰뚫어본 인상기를 담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강렬한 감동을 준 화가로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을 꼽는다. 쿤데라는 한 잡지에 베이컨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베이컨은 이를 읽고 “스스로를 발견한 드문 글 가운데 하나”라고 전해 왔다고 한다. 그 에세이는 베이컨의 뮤즈였던 여인 헨리에터 모레스의 초상 삼부작에 대한 글이었다.

“베이컨의 초상화는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한 개인은 여전히 그 자신으로 남아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사랑하는 존재는 여전히 사랑하는 존재로 남아 있을까? (중략) ‘자아’가 더 이상 ‘자아’이기를 멈추는 경계는 어디인가?”(19쪽)

쿤데라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강하게, 문학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담긴, 우스운 일이 전혀 없는데도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역설적인 희극적 상황을 그 자신이 체코 프라하의 영화학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만난 한 청년의 에피소드로 풀어낸다. “나는 그게 웃는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웃지 않는다. 그의 웃음은 진본들에 섞여 있는 모사본의 효과를 가져 온다.”(39쪽)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두고는 “소설 예술의 극치인 동시에 소설의 시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라고 평한다. ‘백년의 고독’을 비롯한 위대한 소설의 중심인물들은 아이가 없다는 논지를 이어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 속) 일가의 어머니인 우르술라는 죽을 때 백스무 살이었고 소설이 끝나기 한참 전이다. 그리고 모든 작중인물들의 이름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호세 아르까디오, 호세 아르까디오 2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아우렐리아노 2세 등 비슷해서 그들을 구분하는 윤곽선은 희미해지고 독자는 그들을 혼동한다. (중략) 나는 이 소설이 소설 예술의 극치인 동시에 소설의 시대에 보내는 작별인사 같은 느낌을 받는다.”(63쪽)

이밖에도 쿤데라와 교류했던 작가 르네 데페스트르, 카를로스 푸엔테스, 루이 아라공 등 거장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숨겨진 ‘자아’를 만날 수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