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적과 의미있는 삶을 살 것인가… ‘하버드 문학 강의:문학의 사회적 성찰’

입력 2012-03-29 18:26


하버드 문학 강의:문학의 사회적 성찰/로버트 콜스/이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일반 교육 105’로 알려져 있는 로버트 콜스(83) 교수의 강좌 ‘문학의 사회적 성찰’은 문학 전공 학생만이 아니라 ‘가장 총명한 미국 학생들’로 분류되는 학부생 전체를 위해 개설됐다. 권력과 자만에 찬 하버드라는 전통적 장소에서 ‘나’와 ‘사회’를 고민하는 균형 잡힌 인간으로 학생들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개설된 이 교양 과목은 한번에 600명 이상이 수강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영문학과 의학을 넘나드는 콜스는 1975년에 시작해 20여년 동안 이어져온 강좌에서 어떤 식으로든 실제 삶과 작품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려는 작가들을 다루었다.

지금은 대가(大家)로 인정받고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문단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주변부에서 서성이던 비주류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들과 배우지 못한 자, 불운과 불행에 의해 미래가 제약된 사람들 사이의 불균형에 대해 생각한 작가들이었다.

작가 제임스 에이지(1909∼1955)의 아버지는 미국 남부 애팔래치아 지역 자작농 출신이었다. 에이지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반항적인 청년으로 성장했으나 고등학생 때 문예지에 기고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덕분에 하버드대 문턱을 넘고 졸업 후 ‘포천’지 기자로 입사한 그는 1936년 ‘포천’ 발행인 요청으로 앨라배마의 소작농 가족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쓰게 된다.

당시는 대공황 시절이라 미국인 모두가 엄청난 고통과 시련 속에 있었다. 에이지는 이 취재에 친구이자 사진작가인 워커 에번스를 참여시켰다. 그 결과물이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칭송하자’라는 르포르타주이다. 에이지가 자본주들을 두둔하는 ‘포천’ 편집자들과 갈등을 빚는 바람에 원고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앨라배마 전체에 불이 꺼져 있다. 모든 잎사귀가 흠뻑 젖고 거미줄은 무거워졌다. 길이 있으나 아무도 그 길을 사용하지 않고 밭이 있으나 아무도 밭에서 일하지 않는다. 사람도 짐승도.”(45쪽)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칭송하자’는 성서와 성서의 리듬, 셰익스피어와 그의 리듬을 따라간다. 에이지는 노래하는 작가였다. 충동에 의해 즉흥적으로 노래한 호머와 셰익스피어처럼, 그리고 미국의 아름다움과 추함, 미국의 대지와 사람들에 대해 노래한 월트 휘트먼처럼.

미니멀리즘의 대표적인 작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의 아버지 역시 가난한 삶을 청산하기 위해 아칸소 주에서 태평양 서부 해안으로 이주한다. 카버 역시 생계를 위해 공장과 농장 등지를 전전했다. 골초에다 알코올 중독자였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수위로 일할 때 교대 시간을 이용해 문학수업을 청강하며 습작시절을 보낸다. 이것을 발판으로 아이오와 작가워크숍에 참가하게 된 그는 공용 세탁기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에세이로 발표해 작가가 됐다.

“나는 뒤에 서서 기다렸다. 이 여인은 한 손을 건조기에 넣어 옷가지 몇 개를 잡았지만 곧 옷이 덜 말랐다고 판단했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바구니를 들고 주춤주춤 물러나 다시 대기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무기력한 좌절감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와중에, 나에게 그동안 일어난 일들 중 어떤 것도-진심으로 어떤 것도-내게 두 아이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게 늘 아이들이 있을 것이며, 내가 이 피할 수 없는 책임과 번민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128쪽)

카버는 가난한 노동자들, 식당과 술집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들, 모텔에서 일하는 종업원 등 타인의 시각을 통해 우리가 시력보다 더 큰 시력, 즉 통찰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다섯 살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위해 여공으로 취직했던 틸리 올슨(1912∼2007)도 고통스러운 삶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카버와 비슷하다.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일생을 보낸 올슨은 한 남편의 아내, 아이들의 어머니, 노동자, 노동운동가라는 여러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그런 신산한 삶을 바탕으로 그녀는 ‘나는 다림질을 하며 여기 서 있다’라는 소설에서 십대에 미혼모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대표작 ‘수수께끼를 내 봐’에서는 낭만적으로 미화된 모성이 아닌 고민하고 갈등하는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콜스의 강의를 들어보자. “‘수수께끼를 내 봐’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거슬리는 존재다. 남편은 툭하면 아내의 비위를 건드리고 아내를 잊을 줄도 용서할 줄도 모른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언제쯤 그들이 서로 간의 이런 긴장을 파악하여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그리고 우리를 위한 해결책도 있을지 궁금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결혼생활의 수수께끼이자 우리가 사랑과 이해와 자존감을 얻기 위해 애쓰거나 기숙사나 가정, 직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 할 때 직면하게 되는 우리 삶의 수수께끼이다.”(175쪽)

콜스가 강의에서 다룬 작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떤 정교한 문학적 기교에 의존하기보다는 구성진 입담으로 자신이 겪은 고단한 삶을 솔직하게 전하는 이야기꾼이다.

‘하버드 문학 강의’는 제목에 ‘문학’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만 문학의 범위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다른 예술 영역도 함께 다룬다. 콜스는 서론에서 이 강좌의 목적에 대해 미국의 여성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에 비유해 들려준다. “빌리 홀리데이는 말하자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또 한 명의 화자다. 빌리는 혼신을 다해 노래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재능 있는 가수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사랑과 상실을 어루만지고 음미하고 이야기하고 고백하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빌리는 이 책에서 살펴보게 될 작가와 시인, 사진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학문과 문학과 예술적인 열정을 도덕적 관심과 질문들-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과 조화시키려고 애쓴 사람이다.”(8쪽)

콜스의 관점에서 보면 음악이나 회화도 문학 못지않게 훌륭한 스토리텔링이요 내러티브이다. 문학이 철학이나 역사 사이에 놓여 있는 장벽을 허무는 마당에 미술이나 음악 같은 인접 예술을 포용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학문 간 통섭이 강조되는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 강의를 하버드대는 이미 37년 전에 개설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