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금덩어리를 나일강에 던지다니!
입력 2012-03-29 21:24
로마의 귀부인 중에 멜라니아라는 이름의 신실한 여자가 있었다. 이 여인은 로마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거부(巨富)였다. 이탈리아며 남프랑스며 스페인은 물론, 북아프리카 곳곳에까지 수백 수천의 노예들이 일구어야 하는 대농장을 즐비하게 소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멜라니아가 유명해졌던 건 비단 엄청난 재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먼지 털듯 재산 빈민에 나눠줘
그녀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을 따라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면서 재물을 마치 먼지 털듯 떨구어냈다. 멜라니아는 어느날 남편과 함께 로마를 떠나 예루살렘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돌면서 거대 토지를 팔아 금덩어리로 바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이집트에 도착했다.
이집트에 도착한 멜라니아는 남편과 함께 당시 명망 높았던 사막 기독교인을 찾아갔다. 그 수도자의 몸은 말랐고 옷은 남루했지만, 한마디 한마디 울리는 말마다 기품과 영적인 힘이 배어 있었다. 로마의 귀부인으로 화려한 생활에 익숙했던 멜라니아는 수도자의 삶에 감동받아 갖고 있던 금덩어리를 헌금하려 했다. 아마도 그 금덩어리는 스위스 은행마크가 번쩍거리는 1kg짜리 순금골드바에는 못 미치더라도, 적어도 18k에 800g 정도는 족히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 같으면 한두 번 정도 사양하다 못이기는 척 하며 받았을까? 아니면 헌금이니 사양할 것도 없이 그냥 덥석 받고 말았을까? 그냥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해지고 갈등이 된다. 이 당시 교회전통은 헌물을 받아 가난한 자들을 위한 무료병원 운영, 무료음식 보급 등을 위해 사용하던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집트 사막 기독교인들은 금덩어리를 돌덩어리 보듯 했다고 한다. 덕망 높은 그 수도자는 멜라니아의 금덩어리를 한사코 사양했고, 멜라니아는 하는 수 없이 수도자 몰래 금덩어리를 그 거처에 숨겨놓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수도자는 멜라니아가 떠난 얼마 후 금덩어리를 발견했고, 멜라니아 일행을 금방 뒤따라가 나일강의 배에까지 올랐다. 그는 멜라니아에게 금덩어리를 돌려주려 했으나 멜라니아가 그것을 받을 리 만무했다. 양자가 이런 정도의 덕망을 갖추었다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업에 쓰겠다고 한발 물러서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사막 수도자들의 영성 앞에선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 수도자는 멜라니아의 거절에 직면하자 금덩어리를 악어가 우글거리는 나일강 한가운데에 던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멜라니아의 생애에 소개되는 이 일화는 여기에서 그친다. 수도자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혹자는 그 당시 기준으로 약 400명의 걸인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는 금액을 버렸다고 수도자를 책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실용주의적 사고를 잠깐 접어두고, 잠시 그 시대의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 보자. 구제는 멜라니아가 하면 되는 것이지, 멜라니아가 헌금한 금덩어리로 굳이 그 수도자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막 수도자들은 헌금을 받아 구제를 하면 허영의 마귀에 농락당한다고 보았다. 자기 것도 아닌 것으로 마치 자기 것인 냥 도와주는 것이니 허영이라면 허영일 수도 있겠다.
깨끗함이야말로 참된 힘
나아가 그 헌금은 멜라니아에게도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덕망 있는 수도자를 금 덩어리로 도와주었다는 생각은 자칫 교만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심리학은 교만의 마귀와 허영의 마귀를 가장 지독한 마귀로 보았다. 금덩어리는 멜라니아의 영혼에도 수도자의 영혼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나일강 악어의 노리개로 적당했던 것이다.
힘이 능력에 있다고 생각들 하지만, 깨끗함이야말로 참된 힘이다. 깨끗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깨끗함이야말로 눈에 밝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가 사막의 기독교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는 그들의 우직한 순수함과 맑은 영혼이 너무나 욕심 많은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기 때문이리라.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한영신학대 교수·캐나다 몬트리올대 초청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