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택 (18) SBS 관현악단, 25개 악기로 하나님을 연주하다

입력 2012-03-29 18:21


1991년 SBS 개국을 앞두고 나는 걱정 하나를 떨쳐내지 못했다. SBS 관현악단장으로서 공식 활동을 시작하면서 꼭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25명의 단원 중 16명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억지로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싫어할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5명만 모여서 따로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개국전야제 날이 됐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단원들 앞에서 내 속내를 밝혔다.

“여러분 가운데 비기독교인이 여러 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모두 다 함께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다음 공식 활동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러곤 단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단원들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설득을 하고서는 나름의 ‘약식 예배’를 인도했다. 그때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기적이 떠올랐다.

“여러분은 저를 잘 알지 않습니까. 예전의 김정택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변화된 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항상 모자랍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란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이 채워지고 은혜로 넘치게 됩니다.…”

나는 나름대로 말씀을 전했다. 말이 좋아 말씀이지 풋내기 신자의 어설픈 고백이었다. 내 입장에서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말에 질서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때는 그게 나의 한계였는걸. 하인들이 순종해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보았듯이 우리도 주님께 순종하자, 뭐 그런 메시지였던 것 같다.

그리고는 악보 한 장씩을 돌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찬송가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새찬송가 310장) 연주를 시작했다. 한 소절쯤 나갔을까, 단원들도 저마다의 악기를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주가 이어지면서 아름다운 앙상블을 이루며 울려 퍼지는 찬양 소리가 천상의 음악보다 아름다웠다. 연주를 하면서 저마다 감동에 젖는 표정이었다. 비록 그 찬송가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모르는 단원들이라 하더라도 저마다의 화음으로 어우러졌다.

나와 기독교인 단원 9명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목이 메어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찬송가 가사처럼 나 같이 쓸데없는 죄인에게, 우리처럼 연약한 자들에게 왜 이리 큰 은혜를 주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눈물로 찬송가를 부르자, 다른 단원들도 분위기에 젖어 울먹거렸다. 단원들은 몰랐지만 나는 그때 강한 성령의 임재를 느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나는 단원들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 어린 단원들은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연장자 몇 분에게는 조심스러웠다.

“형님들, 저는 우리 악단을 위해서 매주 월요일 아침 스케줄 브리핑에 앞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담스러우면 예배 시간에 형님들은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세요.”

“아, 그러면 되나요. 같이 해야죠.”

의외의 반응이었다. 참으로 감사했다. 그렇게 우리는 월요일마다 저마다의 악기로 찬양하면서 나름의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는 돌아가면서 기도와 설교를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단원들끼리 예배를 드리다보니 이번에는 방송국 안에 신우회를 만들고 싶어졌다. 이 또한 조심스러웠다. 안 그래도 관현악단이 개국하자마자 매주 예배드린다고 웅성거리는 판에 내가 주도적으로 나서면 너무 설친다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차에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 생겼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