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4) 베드로, 땅 끝으로 가다
입력 2012-03-29 18:23
베드로, 바벨론을 선교센터 삼아 터키 서북방에 편지로 은혜 전해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던 베드로는 AD 44년 아그립바 Ⅰ세의 박해로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한 후 체포당해 투옥되었으나 천사가 옥문을 여는 기적으로 탈출하여 예루살렘을 떠났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 그는 교회의 모든 일을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에게 부탁했다.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행 12:17)
그 때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왜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게 교회를 맡기고 떠났는가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유대를 떠난 성도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으나 가장 조직적으로 교육과 전도가 이루어지던 곳은 안디옥 교회였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바울이 아직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 로마에도 이미 교회가 있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행 18:1∼2)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을 만나기 전에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 전에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롬 16:1) 편에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 ‘로마서’를 보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즉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에 이미 로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한 것일까? 학자들은 오순절에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이 있은 후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 가운데 로마에서 온 유대인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행 2:9∼11)
그들 중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들이 로마에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으리라고 추정한다. 또 로마서에서 바울이 안부를 물은 성도들 중에는 그의 친척들이나 그와 함께 사역하다가 로마로 간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이미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은 후 로마로 돌아간 고넬료의 영향도 상당히 컸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가 고위 관료가 되었을 고넬료의 영향력이 로마 교회에서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 13:1)
로마 교회는 처음부터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추대했다. 물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신 예수의 말씀이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그리고 또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표도 주어졌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그러나 로마 교회는 후일 모든 교회의 대표권을 확보하기 위해 베드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것보다 먼저 로마 교회의 수장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려 했다. 그래서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베드로의 모든 행적을 로마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다. 그 하나의 예로 베드로전서의 기록 장소가 그렇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벧전 5:13)
로마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바벨론’을 ‘로마’로 해석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로마를 암호처럼 바벨론이라고 썼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AD 63년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된다. 그리고 마가가 베드로의 구술을 받아 쓴 것으로 보이는 마가복음의 기록년대도 AD 63년 이후가 될 수 밖에 없다. 네 복음서를 비교해 볼 때 그 중에서 마가복음이 첫 번째 복음서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렇다면 마태, 누가 복음은 더 나중인 AD 70년 이후에나 기록된 것처 된다. 그러다보니 심지어는 네 복음서의 기록자가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이 아닐 수도 있다거나, 나중에 기록되어 그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자도 있고, 아예 네 복음서는 AD 100년이 훨씬 지나서 교회가 적당히 만들어 썼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과연 바벨론은 로마였을까?”
우선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AD 63년에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전혀 심하지 않았다.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이송되었을 때에도 일반 주택에 연금되었으며 외출만 금지되었고, 찾아오는 사람은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행 28:16)
그는 연금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전도 활동을 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지 얼마 안돼 바울은 석방되었다.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하기 시작했던 것은 후에 AD 64년의 대화재 사건 때 네로 황제가 자신이 방화했다는 혐의를 그리스도인에게 씌우기 위해 그들을 검거하여 문초하고 죽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네로의 성격이 처음에는 온화해서 바울의 신앙 옹호가 초기에는 받아들여졌으나, 그가 지독한 죄악을 저지르고 난 후부터 사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22)
그러므로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로마의 박해 때문에 로마를 바벨론으로 썼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실제로 바벨론에 갔었고 그렇다면 안디옥보다는 다메섹을 거쳐서 갔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가 바벨론에 갔었다는 것은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베드로가 이 편지의 수신자로 적어 놓은 목록은 모두가 지금 터키 지역의 서북방 즉 바벨론을 꼭지점으로 한 부채꼴처럼 퍼져 있는 지역들이다. 따라서 바벨론은 베드로가 주재하던 선교 센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편지 말미에 있는 실루아노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벧전 5:12)
실루아노의 약칭은 실라이며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때 수행한 사람이니 그가 로마에서 대필한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실루아노 역시 다른 이름들처럼 흔한 이름이어서 바울의 수행자인 실라라고 확증하기 어렵고 실루아노에 붙은 전치사 ‘디아’는 그가 대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베드로의 편지를 수신자들에게 배달했다는 뜻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때 마가가 베드로와 같이 있었다면 마가복음을 받아 쓴 마가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그의 편지를 대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바벨론에서 베드로가 불러준 것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면 바울이 그를 떼어 놓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난 AD 50 년 경이 될 것이고, 기존의 학설보다 10년 이상을 앞당길 수 있는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