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임미정] 어머니의 밥상

입력 2012-03-28 18:29


이웃에 어머니가 산다. 가끔 주말에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이나 할까 해서 청하면 어머니는 늘 그러신다. “아휴, 비싼데(아마도 그냥 습관적인 단어이리라), 나가서 먹지 말고 내가 금방 생선찌개 끓일 테니 같이 먹자.” 그리고 마트에 가서 생선 한 마리를 만원에 사서 생태찌개를 끓여 주셨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만원이면 둘이 식당에 가서 여러 가지 반찬에 맛난 것을 먹을 수 있는데, 달랑 생태 한 마리에 만원이나 주고 요리까지… 웬 고생이람?”하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돈암동에서 성북동 올라가는 길에는 그리 비싸지 않은 맛집이 많기에 어머니의 방식은 도무지 셈이 안 맞고 이해가 가지 않는 해법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엔 내가 어머니의 행동을 따라하는 버릇이 생겼다. 외식이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되도록 집에서 먹으려고 한다. 또 많이 먹거나, 맵고 짜고 강한 것을 먹으면 몸이 영 불편하다. 주위에서 말하길 이제 나이가 들어 소화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좀 유식해져서 유기농과 같은 먹거리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기에 뒤늦게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인생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몸은 머리가 내리고 진행하는 결정에 따라 말없이 따라준다. 몸이 별 탈 없이 따라주는 것을 우리는 통상 건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몸은 무조건적으로 따라만 오는 도구가 아니라, 예민한 신호체계로 구성된 고차원의 시스템이다. 너무 뜨거우면 신경이 뜨겁다고 말해주고, 추우면 춥다고 신호를 보낸다. 더우면 땀을 내주고, 많이 먹으면 배탈을 낸다.

이러한 신호를 보내지 않는 몸은 건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실한 시스템이다. 간혹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언뜻 보면 아픔을 안 느껴서 편할 것 같지만 더 큰 화를 불러온다. 그래서 난 나이가 들면서 예민해지는 몸을, 부실해지는 것이 아닌 몸이 삶과의 밸런스에 더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더 성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것이나 몸의 상태에 대한 것은 몸과 정신의 밸런스, 즉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고, 삶의 질은 그 사람의 인생철학을 반영할 것이며, 그 철학은 소박한 각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 어머니처럼 건강하게 자식들에게 폐 안 끼치고 사시려는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돈을 벌거나, 정치를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자연의 일부로 살거나, 신에게 이르는 길을 걷는 분 등 다양한 우리 모두는 이야기의 완성을 꿈꾼다. 그리고 몸은 세월이 지날수록 그 이야기의 완성을 우리가 젊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돌아보도록 예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난 감사하게도 최근에, 그 이야기의 섬세함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임미정 한세대 교수·하나를위한음악재단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