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떠나자, 귀신고래 놀던 그곳으로… 귀신고래가 뛰어놀던 울산의 바다
입력 2012-03-28 18:08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2년. 미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1884∼1960)는 ‘악마 물고기(Devil's Fish)’를 찾아 일본의 포경선을 타고 ‘물 반 고래 반’의 고장인 울산 장생포를 찾았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귀신고래라고 부르던 회색의 거대한 고래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장생포에서 1년 동안 머물며 귀신고래를 연구한 앤드루스는 귀신이 곡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이 악마 물고기에게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훗날 미국 뉴욕박물관장을 역임한 ‘고래박사’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 카우보이 모자가 잘 어울리는 그는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이었다.
귀신고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울산 바닷가 여행은 송창식의 ‘고래사냥’처럼 흥겹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신비롭다. 출발점은 새해 첫날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서생면의 간절곶.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등대와 세계에서 가장 큰 우체통이 이색적인 간절곶 앞바다는 귀신고래들이 좋아하는 암초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언덕 위에 위치한 하얀색 저택은 드라마 ‘욕망의 불꽃’ 촬영지.
길이 16m에 무게가 35t이나 되는 귀신고래는 여느 고래와 달리 피부가 회색인데다 따개비 등이 붙었다 떨어진 하얀색의 둥근 자국들이 많아 무섭게 생겼다. 하지만 암초에 붙은 미역을 따먹기 위해 육지와 가까운 연안을 놀이터로 삼는 습성 때문에 반구대 암각화와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 등장할 정도로 한국인에게는 친숙하다. 그러나 귀신고래는 남획으로 멸종되다시피 해 1970년대 말 이후로는 울산을 비롯한 동해안 연안에서는 공식적으로 발견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빛이 맑기로 유명한 진하해변도 간절곶과 마찬가지로 해돋이 명소. 물이 빠지면 해변과 모래톱으로 연결되는 명선도의 소나무 사이에서 떠오르는 해가 황홀하다. 특히 바다안개가 자욱한 날 아침, 명선도 주변에서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선들과 점점이 떠있는 암초는 한 폭의 풍경화.
앤드루스가 귀신고래를 추적하기 위해 머물렀던 장생포는 고래잡이가 금지된 1987년까지만 해도 포경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집채 크기의 고래를 끌고 오면 축제 분위기로 들뜨던 곳. 고래 고기를 맛보기 위한 미식가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장생포는 지금은 그물에 걸려 올라온 고래 고기를 파는 음식점과 고래박물관이 옛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장생포에서 출항하는 고래바다여행선은 빌딩보다 높은 화물선 사이를 빠져나와 방어진을 끼고 북쪽으로 키를 잡는다. 아침 햇살에 젖어 더욱 붉은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왕비가 호국룡이 돼 바다에 잠겼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 대왕암 뒤로는 해송과 키 자랑을 하는 울기등대가 귀신고래가 뛰어놀던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고래 구경 포인트는 정자항에서 동쪽으로 10∼20㎞ 떨어진 바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1000∼3000마리의 참돌고래 떼가 수면 위로 튀어 올라 군무를 펼친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참돌고래 떼를 발견하고 군무까지 감상하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억세게 운이 좋은 날에는 동해안을 따라 회유하는 향고래, 흑범고래, 밍크고래, 큰머리돌고래, 큰돌고래, 범고래도 볼 수 있다.
온산산업단지와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단지 등에 의해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해안도로는 주전동에서 비로소 자연 그대로의 해안선을 벗한다. 주전해변은 울산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로 아담한 백사장에는 검은 몽돌이 깔려 있다. 하얀 파도가 쓸려나갈 때마다 몽돌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세상 어떤 악기와 목소리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화음.
주전에서 귀신고래가 출몰하던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던 해안도로는 정자항에 도착하기 전 판지마을 앞바다에서 ‘곽암(藿巖)’을 만난다. 곽암은 미역이 붙어서 자라는 바위로 울산지역 토호였던 박윤웅이 고려의 왕건을 도운 공로로 하사받았다는 암초. 곽암에 붙어 자라는 돌미역은 맛이 좋기로 유명해 당시에 미역채취권은 농토 못지않게 귀중한 재산이었다. 미역을 먹는 귀신고래가 곽암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정자항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주상절리로 유명한 강동 화암마을이다. 주상절리는 분출된 용암이 냉각되면서 열수축 작용으로 단면이 육각형이나 삼각형으로 된 긴 기둥 모양의 바위가 겹쳐 있는 특이한 지질. 2000만년 전에 형성된 화암마을의 주상절리는 마치 육각형의 연필을 쌓아놓은 듯하다. ‘화암(花岩)’이라는 마을 이름은 주상절리의 단면이 꽃무늬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졌다.
주상절리는 화암마을에서 6∼7㎞ 떨어진 경북 경주 양남면의 읍천리에서도 발견된다. 화암주상절리와 해저로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읍천주상절리는 바닷가 언덕에 주둔해 있던 군부대가 4년 전 철수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읍천주상절리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부채꼴 모양으로 유명하다. 육각형의 거대한 돌기둥들을 바다 속에 가지런히 깔아서 마치 돌로 부채를 펼친 듯한 형상이라고나 할까. 주상절리가 수평으로 누워있는 경우도 드물지만 동그랗게 형성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울산의 고래연구소가 포상금까지 걸고 추적하고 있는 귀신고래, ‘인디아나 존스’ 5탄에나 나올법한 그 귀신고래가 2년 전 읍천주상절리 앞바다 10마일 해상에서 조업하던 어민들에게 두 마리나 목격됐다고 한다. 귀신고래가 출몰한다는 날씨 궂은 날. 암초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귀신고래가 숨쉴 때 나오는 분기처럼 보이는 것은 녀석에 대한 추억 때문이리라.
울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