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막 오른 국제금융체제 변화

입력 2012-03-27 18:22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올 3월은 ‘코리안’이 자신을 울리고 웃긴 달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 16일 북한이 발표한 광명성 3호 위성 발사 계획은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주요한 외교적 치적으로 삼을 작정이던 ‘2·29합의’가 잉크도 마르기 전에 휴지 조각이 될 위기에 처했다.

1주일 뒤 한국계 이민 1.5세인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은 오바마를 환하게 웃게 했다. 김 총장을 차기 세계은행(WB) 수장으로 추천한 뒤 잇따른 세계 유력언론의 찬사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WB 총재는 미국인이,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유럽인이 차지하는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의 유산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성추행 의혹으로 중도 하차한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를 이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프랑스 재무장관도 지난해 선임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 차기 WB 총재 선임을 둘러싼 논란에 비하면 예고편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국제 여론의 역풍이 거셌다.

국제경제·금융 분야 최고 정론지로 꼽히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달 17일 로버트 졸릭 현 WB 총재가 연임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직후부터 국적에 상관없이, 능력에 기반을 둔 공개경쟁으로 차기 총재를 선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미국과 유럽의 양대 국제금융기구 수장 독식을 ‘통탄할 만한, 추한(nasty) 양자간 거래’라고까지 부르며 변화를 촉구했다. 신흥시장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어선 현실에서 경쟁을 통한 최적임자 선출을 미루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3일 일견 ‘튀는’ 행동으로 비쳐진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의 WB 총재 출마 선언은 결과적으로 경선을 통한 총재 선출을 고려하도록 미국을 압박했다. 지난 18일 니콜라스 스턴과 프랑소아 부르기뇽 전 WB 수석 이코노미스트, 조지프 스티글리츠 전 WB 부총재의 FT 공동기고문도 반향을 일으켰다.

‘독점의 종식: 이제 진짜 세계은행을 만들자’는 제목의 글에서 전직 WB 고위관료이자 존경받는 경제학자인 이들은 유럽과 미국이 여전히 과거의 관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위선적일 뿐 아니라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상호협력과 신뢰를 파괴한다고 맹비난했다.

세계 유력 언론의 김 총장에 대한 찬사는 이런 점에서 ‘조건부’로 해석해야 한다. ‘제한된, 과도기라는 조건 속에서 찾아낸 으뜸패’라는 게 더 실상에 가까워 보인다. 특히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의 긍정적 평가에는 개도국·신흥국의 거센 반발과 미국의 전통적 ‘지분’을 지켜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극적인 카드를 찾아냈다는 안도가 느껴진다.

김 총장이 사실상 WB 총재로 확정된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하지만 이번 추천이 갖는 더 근본적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1946년 WB 설립 이래 처음으로 ‘신사들의 협약’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과 유럽이 막후에서 수장을 결정하던 관행이 깨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이 오른 이 변화의 물결을 IMF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른 예측이긴 하지만 5년 뒤 김 총장의 WB 총재 첫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WB의 지배구조에 더욱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변화를 이끌어 낸 원동력은 브릭스(BRICs)로 대표되는 신흥국들이다. 완전한 신흥국도, 선진국도 아닌 애매한 입지의 한국은 기회는 늘리고 위험은 줄이는 세심한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한국계 총재’ 선임 그 너머를 봐야 한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