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홀로 있는 시간
입력 2012-03-26 18:21
“평생 살아놓고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채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작가 베릴 마킴의 말이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많은 정보들과 만나고 생존에 필요한 많은 지식들을 축적한다. 사람들이 분주한 것은 이런 만남과 지식들을 넓히려고 하기 때문 아닌가. 그러나 정작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고 생을 마감한다면 참으로 허무한 삶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꼭 만나야할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무심한 ‘참 나’가 아닐까. 참 나와 만나려면 먼저 마음의 속도를 줄이고 의도적, 의식적으로라도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 시간은 조용한 반성의 시간이며, 삶을 생각할 시간이고, 꿈꾸고 상상하는 시간이며, 자신의 영혼에 드리워진 삶의 무거운 먼지들을 덜어내는 시간이다.
지난 6년간 나는 봉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기관장 역할을 맡았었다. 지인의 농담섞인 말대로 해놓은 일 없이 몸만 분주했던 6년이 흐르고 이제 내 자리로 돌아와 연구실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가 많아졌다. 학장실에 앉아 있을 때는 정말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며 어디에 숨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연구실에서 조용한 시간들을 보내자니 처음 한 달은 적적하고 적응이 안 되는, 소위 보직 후유증을 조금씩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홀로 있는 공간과 시간들이 참 좋다. 내가 있어야할 공간, 내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있는 평안함이 행복한 삶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듣기 거북한 이야기지만, 한 때의 자랑이었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사회의 문제점이 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참 마음이 아프다. 여러 원인들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먼저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너무 분주해져 자신을 돌볼 시간들이 없었고, 그 결과 거룩한 상상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거룩한 상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홀로 있어야 한다.
크리스천이란 원래 ‘인간의 창가’와 ‘신의 창가’를 오가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로서 우리는 ‘인간의 창가’에서 땀 흘리며 일해야 한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분주한 스케줄대로 엮이며 살아야 생존할 수도 번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때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처럼 거룩한 공간을 만들고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며 ‘신의 창가’에 설 수 있을 때 거룩한 상상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신의 창가’란 내 영혼을 내 삶에 초대하는 시간이다. 참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그저 생각 없이 분주하게 함께 걸어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다. 많은 사람들이 간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이 결코 최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등만 보고 따라 걷다가는 이정표가 사라진 막다른 길을 덜컥 만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신곡의 작가 단테가 그러했고 연금술사의 작가 코엘료가 그러했다. 자신이 걷던 삶의 길에서 길을 잃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길속에서 길을 잃은 그들은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내며, 홀로 있는 시간들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홀로 있어 보라. 그날 조간신문에 나온 기사를 접할 수 없는 공간. 그저 당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미래에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 체험하고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스러운 공간을 만들어 활용하다 보면, 언젠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캠벨의 말을 듣고 나도 성스러운 공간을 가져보기로 다짐했다. 먼저 전화기를 끄고 모든 외부의 자극과 접촉을 차단하고 홀로 있는 시간, 홀로 있는 공간을 만들어 참 나와 대화하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보기로 작정했다. 매일 아침 혹은 저녁 아니면 점심 식사 후, 나만의 시간,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아주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내 안의 아티스트와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하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