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복장 논쟁의 불을 지핀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 존 후퍼 (上)
입력 2012-03-26 17:53
사순절 설교때 에드워드 6세 앞에서 서임식 예배규칙 강하게 비판
1550년 2월 어느 날, 에드워드 6세 영국 국왕은 사순절 기념 설교자로 존 후퍼를 찾았다. 후퍼는 헨리 8세 시절 대륙의 취리히로 망명했다가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영국으로 귀국한 인물이다. 에드워드 6세 통치기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호기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하루에 거의 두 번씩, 못해도 한 번은 꼭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며 사역했다. 그의 설교는 대단한 인기였다. 사람들은 오르페우스가 하프를 연주할 때 내는 선율처럼 그의 설교가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날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설교를 하면 교회당이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늦게 온 사람은 교회당 문턱을 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설교는 감동적이었고, 설교를 통해 나타난 그의 성경 지식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국왕은 그런 후퍼를 불러다 사순절 설교를 시켰다. 그런데 그는 국왕 앞에서 그 전 해에 제정한 서임식 예배규칙(Ordinal)을 강렬한 어조로 비판했다. 서임식 예배규칙에는 성인들의 이름으로 서약하는 것과 성직자의 복장을 입어야 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특히 그는 성직자의 복장이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의 잔재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성직자의 복장은 어떤 성서적 근거도 없으며, 고대 교회에서도 그런 복장을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서임식 예배규칙은 영국 의회가 정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영국의 교회와 영국 교회의 수장인 국왕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밀원과 대주교는 그를 소환했다. 그들은 후퍼가 수장령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는지 조사했다. 수장령은 새롭게 임명되는 성직자들이 서약해야 할 내용 중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논란이 있었지만, 에드워드 6세는 후퍼를 글로스터의 주교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후퍼는 임명을 거부했다. 그 직을 받아들이려면 예배규칙에 따른 서임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예배규칙에 따르면, 성인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하며, 예복을 착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임명 거절은 1549년에 제정된 일치령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일치령에서는 어떠한 선한 이유 없이 서약을 거절하는 것은 국왕과 국가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왕은 후퍼를 소환했다. 왕 앞에서 후퍼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소명했다. 왕은 후퍼의 입장을 받아들였으나, 추밀원은 그렇지 않았다.
1550년 5월 15일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복장 문제는 ‘아무렇게 해도 되는 문제’ 또는 ‘그저 그런 사소한 것’(Res Indifferentes)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후퍼는 재량에 따라 사제복을 입지 않아도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복장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550년 7월 20일 후퍼가 왕과 의회 앞에서 해야 되는 새로운 임직에 대한 서약을 그냥 넘어갔기 때문이다.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양심에 부담스러운 서약’을 시키지 말도록 지시했다. 다른 한편 그는 런던 주교 니콜러스 리들리(N. Ridly, 1500∼1555)로 하여금 후퍼를 설득하도록 했다. 런던 주교 리들리는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서에 근거가 없다면서 1550년 성 바울 사원의 성찬대를 끌어내리고, 또 영국 전역의 성찬대를 치울 것을 선포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성찬대의 파기는 칼뱅주의와 츠빙글리의 견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리들리는 복장문제에 대해 후퍼와 입장을 달리했다. 후퍼는 리들리보다 더 급진적이었고 비타협적이었다. 대륙에 있을 때 급진적인 우상파괴적 경향을 띤 개혁 교회의 영향을 받은 탓도 컸다.
1550년 10월에 후퍼와 리들리는 복장문제를 두고 서로 신랄한 논쟁을 벌였다. 리들리는 복장은 그저 그런 사소한 것이기 때문에 국왕은 누구도 예외 없이 그러한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리들리의 관심은 복장 그 자체보다 교회와 국가의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추밀원은 리들리 편을 들었고, 의회는 의견이 갈렸다.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몇 달이 지났다.
그 사이 후퍼는 복장은 그저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복장 착용을 주장하는 자들은 위선과 미신을 격려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퍼가 사제 복장에 반대하는 이유는 뚜렷했다.
첫째, 그저 그런 사소한 것은 성서 속에 분명한 정당성을 가지거나 아니면 그것의 기원과 기반을 성서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의 사제복 착용은 초대교회에는 없었던 제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은 설교할 때 신자들과 구별된 옷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상 사상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복장’이며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같다.
둘째, 그저 그런 사소한 것은 개인의 재량에 맡겨야만 한다. 만약 그러한 것이 요구된다면, 그것은 이미 그저 그러한 사소한 것이 아니다.
셋째, 그저 그런 사소한 것의 유용성은 증명되어야만 한다. 그런 것이 제 멋대로 교회에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 그저 그런 사소한 것은 전제적 권력이 아니라 사도적 그리고 복음적 관대함에 의해 교회에 도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리들리도 만만치 않았다. 후퍼의 취약점을 찔러댔다. 후퍼가 인용한 성서 구절들은 자의적이다. 그저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성서에 다 기록할 수 없기에 성서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 근거가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은 다르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리들리는 후퍼가 인용한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체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도 조소했다. 후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희생 제물이 되어서 모든 옷을 벗김 당하셨고, 그렇게 그의 제사상 직이 수행되었다”고 주장했다. 리들리는 이에 대해 그러면 우리도 모두 그렇게 나체로 다녀야 하는가고 반문했다. 그는 후퍼가 사제복 착용이라는 그저 그런 사소한 것을 이스라엘 및 로마 가톨릭 교회와 지나치게 동일시했다고 비판했다.
후퍼는 복장 문제로 서임식을 거부하며 완강하게 버텼다. 결국 그는 1550년 12월 중순에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이때 그는 완강하고도 비타협적인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는 ‘기독교 신앙의 경건한 고백과 항변’을 집필해 출간했다. 이 책은 후퍼의 자기 변호였다. 그는 세속적 권위에 대해 복종하라는 명령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회는 플리트 감옥에 그를 수감했다.
후퍼의 입장을 두고 지지와 반대가 갈라졌다. 그러나 영국 종교개혁가들은 후퍼로 인해 종교개혁 진영의 분열이 일어날까 심각하게 염려했다. 이러한 염려는 대륙에 있던 칼뱅과 불링거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후퍼에게 편지를 보냈다. 복장문제는 그렇게 저항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문제라고.
결국 후퍼는 1551년 3월에 법적인 의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복장 논쟁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복장 논쟁은 피의 메리에 의해 후퍼가 순교하고 난 뒤에도 청교도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었다.
복장 논쟁은 영국 청교도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복장 논쟁은 영국 청교도들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며 그들은 사제 복장 착용을 거부했다. 청교도들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타협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까다롭고 고지식한 사람들(Precisians)이라는 뜻의 ‘청교도’(puritan)라 불렸다. 이런 점에서 복장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인 후퍼를 청교도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청교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후퍼는 어떤 사람인가?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