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었다

입력 2012-03-26 18:21


“내가 자신의 시험지 정답을 고친 걸 알고도 너무 착해서 울기만 했던 원표…”

초등학교 시절 그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 것 같아 어른이 돼서도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원표였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내 책에 원표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원표가 내 책을 읽을 거라고 확신할 순 없었지만 글을 통해서라도 원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느 날 방송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는 담당 작가의 물음에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방송 날을 기다리며 어른이 된 원표는 어떻게 변했을까 많이 궁금했다. 혹시나 원표를 만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방송국에 가기 전날 밤엔 잠도 오지 않았다.

방송이 시작될 때까지 마음이 설레었다. 아나운서가 사연을 소개했다. 사연을 재구성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잠시 후 아나운서가 친구의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큰 소리로 원표 이름을 두 번 불렀을 때 음악소리와 함께 원표가 걸어 나왔다. 원표를 끌어안고 울었다. 원표도 울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울고 있는 너와 함께 걸었던 산동네 길을 잊을 수 없었다고 목이 메어 원표에게 말했다. 원표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원표는 여전히 소년 같았다. 밤늦은 시간까지 원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초등학교 시절, 내 짝꿍이었던 원표는 우리 집보다 더 높은 산동네에서 살았다.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웠지만 원표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와 함께 학교에 가기 위해 원표는 매일 아침 우리 집에 들렀다. 월말고사가 있던 날 아침, 원표는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는지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책상 위에 책가방을 올려놓고 시험을 봤다. 마지막 시험은 산수였다.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서 짝꿍끼리 시험지를 바꿔서 채점을 했다. 나는 100점을 받았고, 원표는 두 문제 틀려 92점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원표는 울면서 땅만 보고 걸었다. 울지 말라고 여러 번 달랬지만 그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 앞까지 왔지만 울고 있는 원표를 두고 나 혼자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를 따라 원표네 집이 있는 산동네 언덕을 올랐다. 대문도 없는 판잣집 방문을 열자 원표 여동생이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대낮인데도 방 안은 어두웠고 곰팡이 냄새도 났다.

원표 여동생은 우리 앞으로 밥상을 가져 왔다. 밥상 위에는 찌그러진 찌개냄비 하나와 말라빠진 총각김치만 달랑 놓여 있었다. 겨울인데도 원표네 집 방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내 동생은 심장병이 있어. 그래서 밖에도 잘 못 나가….” 원표 목소리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흐린 백열등 불빛 아래 앉아 원표와 말없이 밥을 먹었다.

무심히 올려다 본 앉은뱅이책상 위에 원표의 우등상장이 걸려 있었다. 신문지로 바른 벽지 위에서 원표의 우등상장은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우등상장을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막노동 일을 다니는 원표 부모님에게 그 우등상장은 얼마나 큰 희망이었을까 생각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여동생에게 그 우등상장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었을까 생각했다.

날이 어두워진 뒤 원표네 집에서 나왔다. 어둠 내린 골목길을 걸어 나오다가 원표네 집으로 다시 달려갔다. 백열등 불빛이 반짝거리는 원표네 방을 향해 나는 소리쳤다. “원표야, 미안해…. 미안해, 원표야….”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달빛 쏟아지는 산동네를 내려왔다.

그날 낮에, 짝꿍끼리 산수 시험지를 바꿔서 채점할 때, 나는 원표가 쓴 정답 두 개를 몰래 고쳐 틀리게 채점했다. 원표가 100점 받는 게 싫었다. 원표는 내가 자신의 시험지 정답을 고친 걸 알고 있었다. 착한 원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것이다. 원표는 나 때문에 월말고사에서 우등상장을 받지 못했다. 막노동을 다니는 엄마 아빠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 여동생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던 원표의 작은 소망을 내가 빼앗아 버린 탓이었다.

이철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