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한 글자 스승

입력 2012-03-26 18:22

初樹江邊京觀碑

觀風殿上縱歡時

無端鬼語加鍼

堪作騷壇一字師

대동강 가 승전비 막 세우고

관풍전 위에서 한껏 즐길 때

갑자기 들려온 귀신 가르침

시단의 한 글자 스승이로다

박미(朴범:1592∼1645) ‘분서(汾西)’


수만 편의 시가 한 글자에 막힌다(富於萬篇 窘於一字)고 했던가. 한시는 글자 하나에 사활이 갈린다. 가도와 한유의 퇴고(推敲) 고사 역시 한시에서 한 글자가 지닌 무게를 일깨워주는 예이다. 글자 하나를 고쳐 시를 살려주는 것을 한 글자 스승, 곧 일자사(一字師)라고 한다.

위 박미의 시는 일자사에 관한 김부식과 정지상의 일화를 읊은 것이다. 김부식은 서경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지상을 죽였다. 일찍이 정지상이 오언시 한 짝을 뽑았는데 그 대구가 탐난 김부식이 달라고 졸랐다가 거절당하자 서경을 진압할 때 정지상을 죽였다는 것이다.

승리에 취한 김부식은 관풍전에서 “버들 빛은 일천 가닥 푸르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 하고 읊었다. 이때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일갈했다. “일천 가닥인지 일만 점인지 세어보았다더냐? ‘버들 빛은 가닥가닥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 해야지.”

둘의 정치적 관계와 문학적 기질이 상징적으로 압축된 이야기다. 정지상의 죽음을 동정하는 정서에 기반해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글자 하나로 시격이 판연히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하늘과 땅처럼 경계가 현격진다고 했던 원매(袁枚)의 말을 이 일화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시문뿐이랴. 한 글자로 삶도 경계한다. 송나라 장영(張詠)이 ‘무사한 세월이 한스러워라. 강남의 노상서가 할 일 없구나’라고 읊었다. 벗 소초(蕭楚)가 이 시를 보고는 ‘한(恨)’을 ‘행(幸)’으로 바꿔 ‘태평한 세월 행복하도다’라고 고쳤다. 이어 “자네는 재상이니 글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네. 재상이 태평성세에 한스럽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하였다. 장영은 “자네야말로 나의 한 글자 스승이네”라고 했다고 한다.

이규필(성균관대 대동硏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