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나?
입력 2012-03-26 17:44
마가복음 14장 66∼72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시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중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여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었다(눅 22:54).
다른 제자들은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예수님 주변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예수님과 함께 수난의 자리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베드로는 예수님 주변에 남아서 예수님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결과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따라왔던 것이다. 용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를 여기까지 따라오게 한 것 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사랑엔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없는 사랑은 결국 실패하거나 배신하거나 희생을 동반할 수가 없게 된다. 희생과 고난을 요구하게 된다면 결국 그 사랑을 버리고 말 것이며 그 사랑의 열매도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중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이것은 정말 예수님을 부인하려 한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기에, 사랑은 하지만 죽음의 위기 앞에서 자기를 부인할 만한 용기가 없었기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만 것이다. 베드로는 아랫뜰에 와서 불을 쬐고 있었다. 아마도 윗뜰에는 예수님께서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베드로를 바라보고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범죄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나를 모르실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시고 재판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수난의 길을 가시고 있는데 그는 불을 쬐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그랬을 것이지만, 자기 선생님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몸이 추운 것 정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라면 예수님이 아파하시고, 예수님이 헐벗어 추우시다면 자기 자신도 결코 따뜻하게 할 수 없는 마음이 앞설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우리가 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반대로 내 몸을 편하게 따뜻하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말에 있어 신뢰성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이켜 그의 인생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다. 결국 회개란 돌이킴이요 회복이다. 회복이 없다면 그것은 절망이다. 그러나 회복이 있으면 그것은 소망이요 축복이다. 베드로에게 이 회복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배신하고 저주 맹세하면서 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어도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의 메시야요. 영원한 구주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 자비와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 베드로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를 어찌 그토록 사랑하시나요. 나와 같은 인간을... 그리고 그는 마침내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닭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김의식 목사 화곡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