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라운지-정원교] 천안문 광장 통제와 내란설
입력 2012-03-25 20:12
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에서 베이징까지 온 웨궈화(岳國華·66)씨는 초췌한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천안문(天安門) 광장 서쪽 가장자리 철책에 아내와 함께 기댄 채 바로 앞 인민대회당 동편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건넸다. 20년 이상 공장 노동자로 일한 그는 다리를 다쳤지만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마침내 ‘상팡’(上訪,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상급 정부기관을 찾는 일)을 위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양회 막바지인 지난 12일 오전 천안문 광장을 찾았다. 중국 인민들은 이번 양회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서였다.
웨씨 부부와 얘기를 나눈 지 2∼3분이나 지났을까. 공안 순찰차가 나타났고 곧이어 공안이 내려 신분증을 요구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순순히 응할 수밖에. 그런데 동행한 또 다른 공안이 이런 전 과정을 비디오카메라로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신분 확인됐으면 그만이지 비디오 촬영은 또 뭔가?”
그제야 상대방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다. ‘중국의 규정’이 그렇다”고 했다. 여기서 취재하려면 광장 한 켠 사무소에 가서 허가를 받으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광장에서 대화하는 것도 허가를 받으라니? 신분증은 돌려받았지만 웨씨 부부가 순찰차에 실려 가는 걸 멍하니 바라볼 당시 참담한 기분이란….
잠시 뒤 천안문 광장의 역사성에 생각이 미쳤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1949년) 선포 현장이 광장 앞 천안문 성루였는가 하면 66년 문화대혁명 때는 100만 홍위병이 운집하지 않았던가. 그 뒤 1차 천안문 사건(76년), 2차 천안문 사건(89년) 등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가 바뀌게 된 곳도 바로 여기였다.
이번 양회 때 광장을 오가는 라오바이싱(老百姓, 일반 국민)보다 경찰이 더 많았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싶었다.
“천안문 앞을 지나는 창안제(長安街)가 군용 차량으로 숲을… ”
며칠 전 중국 인터넷을 달궜던 내란설도 ‘천안문’이라는 장소가 들어가야 얘기가 됐다. 하지만 통제가 엄혹할수록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유언비어가 더 기승을 부린다는 사실을 중국 지도부는 깨닫고 있는 것일까.
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