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막힌 보청기회사 회장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연극 ‘인물실록 봉달수’
입력 2012-03-25 18:05
남의 얘기는 귀담아 듣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는 고집쟁이 노인이 있다. 이름은 봉달수, 직업은 보청기회사 회장이다. 소통에는 별로 관심 없는 양반이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기기를 만들어 파는 회사의 리더라니 설정부터가 웃긴다. 돈도 제법 벌고 나름대로 출세했다고 자부하는 봉 회장이 자서전을 쓰겠단다. 대필 작가로 잘 나가는 여류 소설가를 불렀다.
서울 정동 한화손보세실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인물실록 봉달수’는 외골수 노인과 까칠한 여류 작가가 자서전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와 러브스토리를 코믹하게 담았다.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작가적 자존심을 걸고 자서전 같은 것은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맹세하던 신소정은 평생 봉 회장을 모셔온 황 비서의 끈질긴 섭외를 뿌리치지 못하고 조건부로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작품료 전체를 오늘까지 넣어주셔야 해요. 내용에 관해선 일체 간섭을 해선 안 되고요.” 깐깐한 신소정의 요구에 봉 회장은 “내 돈 내고 내 자서전 내겠다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며 혀를 차지만 별 수 없이 결국엔 계약을 하게 된다. 자서전 내용을 두고 두 사람 간의 팽팽한 심리전으로 전개되던 연극은 봉 회장이 부인과 사별하게 된 대목에서 급선회한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젊은 시절, 잡음은 차단하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들을 수 있는 획기적인 보청기 개발에 성공한 봉달수는 평소 힘을 불어넣어준 주인집 딸과 결혼한다. 아내는 그러나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다. 훗날 사업에 성공한 봉달수는 회사 행사 등에 부부 동반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아내를 방치한다. 소외된 아내의 선택은 막다른 길이다.
자칫 신파조로 흐르기 쉬운 스토리는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 ‘서울 열목어’ ‘땅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 등의 히트작 대본을 쓴 김태수(한국희곡작가협회 이사장) 작가의 따스한 시선과 유머로 웃음과 감동을 전한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자서전을 통해 지난날을 회고하며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재미있게 풀어냈다.
가수 장나라의 아버지로 유명한 연극인 주호성씨가 연출을 맡았다. 주씨는 “흥미위주의 상업 연극이 아닌 정통 연극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주인공 봉달수 역으로 더블 캐스팅된 배우 윤주상과 송영창의 연기 대결이 볼만하다. 굵은 목소리의 윤주상은 강한 캐릭터를 선보이고, 친숙한 이미지의 송영창은 폭넓은 연기로 관객들을 붙잡는다.
자의식 강한 소설가 신소정 역을 맡은 함수정과 유지수도 앙상블을 이룬다. 황 비서 역을 맡은 박기산의 양념 연기가 웃음 나게 한다. 젊은 시절과 현재의 봉달수가 각각의 조명 아래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보청기 CF를 실제 TV 화면을 통해 보여주는 무대장치가 이색적이다. 다만 봉달수와 신소정의 관계를 어정쩡하게 처리한 결말이 아쉽다.
세대 간 충돌, 남녀의 성 의식, 빈부 격차 등 대립 구도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연극은 말한다. “소통을 위한 보청기는 신체의 귀가 아닌 마음의 귀에 필요하다”고. 4월 29일까지. 3만∼5만원(02-736-76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