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2) 마리아 그림 앞에서

입력 2012-03-25 18:11


성경 근거 없는 마리아 신격화 안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母性을 느껴

세상을 치유하는 영적교훈 얻어야


마리아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유럽 영성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쉬지 않고 필자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평소에 생각한 대로 그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대답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톨릭 국가를 여행하는 기독교인에게 이 질문은 계속 따라다니는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방문하는 교회, 박물관, 미술관마다 마리아를 주제로 한 많은 그림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피렌체에서도 그랬다. 피렌체(플로렌스)는 글자 그대로 꽃의 도시다. 이탈리아의 예향이요, 르네상스의 진원지다. 단테의 고향이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 보티첼리가 활동했던 주무대였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여기에 있는 성화 몇 점만으로도 피렌체는 충분히 세계적인 도시다.

그중에서 세계 3대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우피치 미술관에 가보자. 대표적인 그림이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도 작품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외 없이 마리아 앞에 선다.

대표적으로 지오토의 ‘오니산티의 마리아’(1306∼1310)가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은 전체적으로 황금빛이다. 마리아가 보좌에서 예수님을 안고 있고 사방에 천사와 성인들이 둘러서 있다.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보면 이상하리만큼 크게 그려져 있다. 주변에 있는 성인, 천사들을 크게 압도한다. 마리아의 우람한 품안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

보티첼리가 그린 ‘대공의 성모 마리아’(1483∼1485)도 있다. 이 그림에서도 마리아는 주변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수님을 안고 있다. 천사들은 하늘의 빛을 받아 마리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준다. 한 천사는 마리아의 노래라고 쓰인 성경을 펼친다. 이 그림에 나타난 마리아는 누가 봐도 하늘의 여왕이다. 마리아 덕에 예수님도 귀하게 보이지만 예수님을 그리려다 마리아를 그렸는지 마리아를 그린 후에 예수님을 끼워 넣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2000년 미술사에 나타난 마리아 그림이 이뿐이겠는가? 마리아 그림은 아마도 모든 세대 기독교 미술가들에게 매력적인 주제였음이 분명하다. 마리아는 그의 부모 안나와 요아킴과 함께, 세례 요한과, 수태고지, 동방박사, 예수님의 다양한 일상,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현장과 함께 우리에게 많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름값을 하는 화가 치고 마리아를 그리지 않은 화가가 없다. 문제는 그림이 아니다. 그림으로 표현된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다. 우리의 관심은 마리아를 어떻게 그렸는가가 아니다. 마리아를 어떻게 그렸느냐 하는 것은 마리아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형상은 본질에서 나오며 본질은 어떤 방식으로도 형태화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성상파괴 운동을 종결했던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787)의 선언과도 같다. 성상파괴 문제로 한바탕 소용돌이가 지난 후 공의회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형상에게 바쳐진 존숭은 그것의 원형에게로 옮겨가며, 성상을 존숭하는 사람은 그 성상 안에 표현되어 있는 위격을 존숭한다.”

그렇다. 우리가 보는 성화 한 점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다. 마리아가 보좌에 앉았다면, 마리아가 화려한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를 원죄 없이 태어난 분으로 믿는다. 소위 ‘마리아 무염시태설’이다.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채 순수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마리아는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 부활, 승천한 분으로도 믿는다. 소위 교황 피우스 12세가 선포한 마리아 부활승천교리의 내용이다. 마리아는 죽어 무덤 속에 내려갔으나 썩지 않고 부활한 후 승천했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없는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당연히 믿지 않는다. 마리아를 이렇게 신격화하면 기왕에 마리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조차도 마리아를 멀리하게 된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감동을 주려면 마리아도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이 아닌 신에게서 하나님인 아들이 태어났다면 그 성육신은 신비롭지도 않고 은혜롭지도 않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마리아에 대한 신격화에는 우리가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마리아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교훈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신성이 있다고 성경 어디에서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평범한 나사렛 처녀로 묘사하고 있는 분명한 성경적 기록에도 불구하고(눅 1:26∼30), 성상파괴 운동 같은 거센 교회사의 반 마리아 우상화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이 계속해서 마리아를 그리고 노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명백하게 잘못된 비성경적인 교리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아베 마리아’를 부르며 숙연해지는가? 거기에는 교리적인 입장에서만 볼 수 없는 다른 요소가 분명히 있다.

역사적으로 마리아론은 기독론과 함께 발전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를 낳은 마리아는 당연히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일 것이다. 마리아론은 역사적으로 성육신 교리를 변호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한 신앙고백의 배경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성경이 처음부터 말한 하나님은 부성적 하나님만이 아니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성적 하나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새끼를 업는 어미 독수리”(신 32:11) 같은 하나님이요, “숨이 차서 헐떡이며 해산하는 여인”(사 42:14) 같은 하나님이다.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사 49:15) 하나님이며 또 “젖을 빨게 하고 품에 안고 무릎에서 놀게 하시는”(사 66:12∼13) 하나님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 모성적 이미지는 어머니 하나님의 전통으로 신약과 교부시대를 통해 교회사에 흘러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 하나님은 요즘 어떤 이단이 주장하는 ‘어머니 하나님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겐, 이레니우스, 크리소스톰, 암브로우스, 어거스틴 등의 초기교회를 거쳐 중세시대의 클레이보의 버나드, 리보의 엘레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이 이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이러한 모성적 하나님 신앙이 역사 속에서 한 인물로 수렴되었는데 그가 바로 마리아다. 마리아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공(功)은 그들의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신학에도 불구하고 모성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흔적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것은 이 ‘모성적 하나님’의 성경적 전통을 ‘하나님 어머니’의 신학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또한 마리아는 남성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페미니스트들의 아이콘도 아니다. 우리가 마리아에게서 긍정적으로 볼 것은 한 평범한 인간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와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 있는 부드러운 모성적 속성이다. 그리고 그 모성적 하나님이 성공주의와 개교회주의, 세속주의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를 부드럽게 치유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