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족이 아니어서 더 따스하다… 기준영 장편 소설 ‘와일드 펀치’
입력 2012-03-23 18:56
소설가 기준영(40·사진)의 장편 ‘와일드 펀치’(창비)는 가족이라는 관계 너머에 있는 사람들끼리 담담한 위로를 전하는 따스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중산층 부부 ‘강수’와 ‘현자’의 결혼기념일에 이들이 사는 이층집으로 강수의 친한 동생 ‘태경’과 현자의 어린 시절 의자매 ‘미라’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여보, 나 당신 처제 마중 나가.’ ‘같이 가줘?’ ‘아니, 우린 한잔하고 들어올 거야.’ ‘나랑 태경일 여기 내버려두고?’ ‘당신이 결혼기념일에 아내를 버려둔 대가치곤 너무 상냥하지.’ ‘아, 내가 음식 해놓을게. 술은 사와서 같이 푸자고.’ ‘태경이한테 나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아이, 우라질.’”(18쪽)
어린 시절 사고로 동생을 잃은 강수, 엄마와 여관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던 현자, 스턴트맨의 불안한 생활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고 딸을 떠나보내야 했던 태경, 그리고 과거에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던 미라. 이들이 함께 기거하면서 나누는 대화들과 마음속 생각들은 절제된 문장들 속에 담긴다. “‘난 미라, 지미라. 이름이 좀 욕 같죠.’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태경이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여자의 손은 차가웠다. ‘오태경’. 태경은 자기 이름을 말하며 손을 빼냈다. ‘이름 같은 건 뭐 아무래도 좋으니까요.’”(20쪽)
가족의 견고한 울타리인 집에 타인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기거한다는 설정은 전통적인 혈연관계 밖의 사람들이 가족처럼 모인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그 안에서 부대끼는 이들의 관계가 애틋하다거나 끈끈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름의 방식대로 서로를 보듬으며 위로를 전한다. 혈연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숭늉처럼 따스한 질료가 이들 각자의 고독과 침묵의 여백에 오히려 깊게 스민다.
“현자는 미라의 두 눈에 말을 걸듯, 시선을 맞추고 섰다. 두 여자가 한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미라의 뒤에는 완주가 잠든 방의 어둠이, 앞쪽에는 거실의 조명 불빛이, 그 빛과 어둠 사이에는 두 여자의 말 없는 유대가 있었다.”(82쪽)
제5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인 이 소설에 대해 평론가 백지연은 “공감이라 해도 좋고 연민이라 해도 좋은 이러한 관계성의 발견은 이들이 소통하고 향유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