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2) 아그립바 Ⅰ세의 최후

입력 2012-03-22 18:21


요한 형제 야고보 처형한 아그립바Ⅰ세, 교만 부리다가 쓰러져

이달리야 부대의 고넬료는 가장 신임하는 부하 하나와 하인 둘을 골라 욥바로 보냈다. 가죽업자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가이사랴로 모셔오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의 이 부분을 기록한 누가는 당시 욥바나 가이사랴에 없었고, 베드로를 만난 적도 없었다. 누가는 후일 이 때의 상황을 어디서 들었을까? 필자는 그가 마가에게서 들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가 사업을 했다면 욥바와 가이사랴에 자주 다녔을 것이고, 또 베드로와는 가까운 처지였기 때문이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이르렀을 때 베드로도 기도하는 중이었다. 율법이 부정한 것으로 규정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으니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듣고 의아해 하던 중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것이다. 성령의 지시로 그들을 따라 간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과 동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을 고치셨다는 것과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설명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은 베드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함께 머물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미 가이사랴의 일을 소문으로 들은 할례자들이 그가 무할례자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지냈음을 비난하자 베드로가 성령이 이미 그렇게 지시했던 그간의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하며 말했다.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6∼17)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더 이상 이의를 말하지 못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그와 같은 소식이 안디옥에서도 들어왔다.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서둘러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견했다. 안디옥에 간 바나바는 다소에 가 있던 사울을 찾아 안디옥으로 데려와서 함께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시려고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인지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에 예루살렘에서는 다시 아그립바 Ⅰ세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1∼2)

새 황제 글라우디오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한 아그립바 Ⅰ세는 이제 로마 쪽에 대한 걱정은 덜었고, 유대인들을 잘 다루어서 국내 치안만 안정시켜 놓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AD 44년 그는 유대인의 신뢰를 얻기 위해 날로 세력이 커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본보기로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먼저 붙잡혀 희생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행 12:3∼4)

당시 마가는 어디 있었을까? 그가 욥바나 가이사랴에 있었다면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것이고, 아그립바 Ⅰ세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잡아들였을 때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애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민심을 안정시켜 로마 황제와 군부에 잘 보이려는 아그립바 Ⅰ세의 조치는 전광석화처럼 신속했고, 마가가 미처 손 써볼 틈도 없이 참수되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투옥도 마찬가지여서 네 명이 지키는 감옥은 접근할 수도 없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헤롯이 베드로를 재판하고 처형하기 위해 끌어내려고 하는 전날 밤에 베드로는 쇠사슬에 매인 채 잠들어 있었다. 두 군인은 그의 양쪽에 붙어 있었고, 다른 파수꾼들은 밖에서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홀연히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어 일으키자 손에서 쇠사슬이 벗겨졌다. 천사의 지시대로 띠를 띠고 신을 신은 후 겉옷을 걸치며 따라가니 옥문이 열렸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결국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고, 아그립바 Ⅰ세는 경비가 소홀했다 하여 파수꾼들을 처형한 후 가이사랴로 가버렸던 것이다. 당시 가이사랴에서는 황제의 안전을 비는 축제가 가까웠으므로 그곳의 극장에서는 화려한 축하 공연이 계획되어 있었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각지의 귀족과 유지들이 모두 참석하는 그 자리는 왕이 자신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공연이 시작된 지 이틀째가 되는 날 이른 아침에 아그립바 Ⅰ세는 은으로 만들어 번쩍이는 옷을 입고 극장으로 나갔다. 떠오르는 햇살이 그의 옷에 달린 은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자 보는 사람들이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현란했다. 그러자 이곳 저곳에서 아그립바 왕이 바로 신이라는 아첨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신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유대고대사 19-8)

아그립바 Ⅰ세는 군중의 찬사를 제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 때 머리 위의 줄에 올빼미가 앉아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왕은 배를 잡고 쓰러졌다. 무서운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왕궁으로 옮겨진 그는 5일 동안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아그립바 Ⅰ세는 17세의 소년이었던 아들 아그립바 Ⅱ세와 베르니케, 마리암네, 드루실라 등 세 딸을 남겨 놓고 죽었다. 아그립바 Ⅱ세보다 한 살 아래인 베르니케는 그녀의 숙부인 칼키스의 헤롯과 결혼하기 전부터 오라비인 아그립바 Ⅱ세와 근친상간을 해온 사이였다. 그녀는 후일 숙부가 죽은 후 다시 가이사랴로 돌아와 오라비와 함께 성경에도 등장하게 된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행 25:13)

아그립바 Ⅰ세가 죽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로마에 있던 아그립바 Ⅱ세로 하여금 부친의 자리를 잇게 했다. 그러나 황제의 측근들인 신하들이 나섰다.

“그렇게 넓은 왕국을 아직 나이 어린 소년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유대고대사 19-9)

황제는 신하들의 말을 옳게 여겨 다시 총독제를 되살리기로 했다. 즉 쿠스피우스 파두스를 유대와 전 왕국의 총독으로 파견한 것이다. 아그립바 Ⅰ세를 감시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파견되었던 이달리야 부대는 왕이 죽고 새로운 총독이 파견되었으므로 더 이상 가이사랴에 주둔할 필요가 없어졌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달리야 부대는 AD 44년 로마로 귀환했을 것이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로마로 돌아간 고넬료가 그 후에 어찌 되었을까이다.

명문가의 후예인데다가 해외 파견 근무까지 잘 끝내고 귀국한 고넬료는 틀림없이 로마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출세의 길에 올라섰고 고위 관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와 기도에 힘쓰던 자였으며,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고넬료가 로마로 돌아간 후 그저 나라 일에만 몰두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필시 그는 로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구제와 복음 전파에 힘썼을 것이다. 다만 성경이 그의 행적을 밝혀 놓지 않은 것은 누가복음의 수신자인 데오빌로 각하처럼 그 이름이 밝혀지면 입장이 곤란해질 정도로 고위층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