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철학자 “내 글에서는 땀 냄새가 납니다”

입력 2012-03-22 18:04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우리 시대를 살아가며·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에릭 호퍼/동녘

평생을 떠돌이 노동자로 살며 독학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수립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1902∼1983). 가구 장인이었던 독일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호퍼는 공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무학력자이다. 어머니는 호퍼가 어릴 때 호퍼를 안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2년 후에 사망했고, 호퍼 역시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실명하고 말았다. 15세 때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이후에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이런 독서 습관은 나중에 위대한 사회철학자가 되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됐다.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호퍼의 삶과 사상을 구체적으로 담아낸 3권의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호퍼의 일상·사색·사상 세세히 느낄 수 있어

◇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Working and Thinking on the Waterfront)’는 1958년 6월부터 1959년 5월까지 쓴 호퍼의 일기장이다. 당시 부두 노동자로 일했던 호퍼의 일상과 사색, 그리고 사색이 사상으로 발전되는 과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감정까지 세세히 느낄 수 있다.

“새벽 5시, 내가 점점 독선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오랜 시간 일하느라 진을 빼고 나면 으레 이렇게 되고 만다. 톨스토이가 어딘가에서 말했지. 일을 하면 개미나 사람이나 독해진다고. 살면서 내 자신을 얼마나 돌아봐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독선에 빠지는 위험부터 남을 비하하는 일까지, 여기저기 내 주변은 온통 지뢰밭이다. 남이라 함은 같이 일하고 같이 사는 동료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지식인을 말한다. 위험하게도 지식인은 대부분 진부하고 허세를 부리며 속빈 강정이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1958년 6월 1일-17쪽)

호퍼는 앞서 1943년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부두 노동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저술 활동을 병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에 “내 글에서는 땀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한 호퍼의 일기장은 훗날 그의 저술활동에 바탕이 됐다.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로 미국 국민들의 추앙을 받았던 사람의 일기장을 들추어보는 건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호퍼의 일상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간소하지만,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고 따뜻하다.

학생운동 원인과 문제점 파헤친 에세이집

◇ ‘우리 시대를 살아가며(The Temper of Our Time)’는 1967년에 출간된 책이다. 호퍼가 첫 저서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을 발표한 이후,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을 모아서 펴낸 에세이집이다. 그때는 호퍼가 부두 노동자 생활을 끝내고 집필 활동에 전념하면서,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수요일마다 학생들과 세미나를 가졌던 시기(1964∼1972)이다. 학생운동이 한창 절정기에 올랐던 당시, 호퍼는 이 책 첫머리부터 학생 소요 사태를 언급하면서, 청소년기의 정신 상태와 대변혁을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유사하다고 말하며 혁명운동의 원인과 문제점을 파헤친다.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도 무대에 등장하는 주연 배우는 역시나 미성년자들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중세 시대부터 전해온 갑옷과 투구가 작다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사실 이런 갑옷과 투구를 입었던 사람들은 성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13세에 결혼하고 10대에 전쟁터에 나가 전사와 장수로 활약했으며 35세나 40세에는 이미 기운이 다한 노인이 되었다. 문제는 청소년기의 심리 상태가 반드시 소년 소녀에게만 국한되어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중략) 특히 20세기에는 거의 세계 곳곳에서 청소년기 현상이 나타났다. 공산주의와 파시즘, KKK단 같은 인종주의, 저개발 국가에서 현재 터져 나오는 대중운동은 누가 봐도 청소년기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18∼20쪽)

호퍼는 이 책에서 미국사회의 흑인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을 지지했던 진보주의 세력의 지지를 잃기도 했다. 호퍼는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인권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지만, 흑인 회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여느 미국인과 똑같이 흑인은 ‘없는 것들’이 아닌 상점 진열창 안의 보이는 것에 흑심을 품는다. 그러므로 흑인 대중이 들고 일어서면 약탈극이 벌어질 뿐 진정한 대중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중운동이 흑인사회의 ‘무방향성’과 ‘무가치성’을 치유해주고 이들을 현재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는지 미심쩍은 것이다.”(75쪽)

1960년대 미국사회의 문제점 명쾌하게 분석

◇ ‘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First Things, Last Things)’는 1960년대에 호퍼가 잡지에 기고한 글 아홉 편을 모아놓은 책이다. 각 에세이마다 인간사를 보는 호퍼만의 독창적인 관점과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문제점, 사회 동향,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호퍼의 명쾌한 해법이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표현돼 있다.

“인간이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동물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인간의 고유성과 창의성의 뿌리가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만족하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다. 주변 동물에게서 보이는 완벽한 모습을 이리저리 합쳐놓고 이를 이상으로 품고 살아간다. 미술과 춤, 노래, 의식을 비롯한 여러 발명은 동물로서 부족한 면을 보완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인간의 영성은 동물성을 극복하려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동물의 왕이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에서 태동한 것이다.”(23쪽)

호퍼의 글을 읽다 보면 공교육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부두 노동자가 어떻게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예리한 통찰력을 갖게 됐는지, 또 그런 독창적인 생각을 누구보다도 감명 깊고 간결한 글로 풀어낼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아마도 호퍼의 통찰력과 독창성의 출발은 보통 사람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어마어마한 독서량에 있었던 것 같다.

이와 더불어 호퍼는 자신이 읽은 책 중 기억할 만한 문구가 있으면 따로 메모해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렇게 모인 메모 카드가 현재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기록보관소에 수천 장이나 보관돼 있다고 한다. 호퍼가 인생 말년에 이를 모아 책으로 출간하려고 시도했지만 사고력에 자신감을 잃고 글 쓰는 것이 힘겨웠던지 책은 끝내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호퍼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방대한 독서에서 발전한 독창성과 통찰력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