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톡 터지는 꽃망울, 섬진강에 봄이 왔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흐르는 섬진강 ‘꽃길’
입력 2012-03-21 19:45
섬진강 꽃길이 드디어 매화 향기로 그윽하다. 섬진강 꽃길은 강을 사이에 두고 경남 하동에서 전남 구례까지 달리는 19번 국도와 전남 광양에서 구례로 향하는 861번 지방도로를 말한다. 매화 향기를 신호로 산수유꽃, 벚꽃, 배꽃이 잇달아 피고 지는 섬진강 꽃길은 한반도에서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길이기도 하다. 매화 향기 그윽한 섬진강 꽃길은 광양과 하동을 연결하는 섬진교 서단에서 시작된다. 한껏 폭을 넓힌 섬진강변을 따라 홍매화, 청매화, 백매화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2㎞ 길이의 강변길을 형형색색으로 수놓았다. 콩알 크기로 부푼 꽃봉오리들은 하룻밤 자고 나면 팝콘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꽃잎이 벌어져 봄의 길목에 위치한 섬진강 꽃길은 하루하루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전북 진안의 데미샘에서 발원한 오백리 섬진강은 실핏줄 같은 개울을 하나 둘 보듬고 전라도를 흐른다. 그리고 하동을 마주한 광양에서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에 섬진강 최고의 풍경화를 그린다. 그 풍경화의 중심에 위치한 꽃마을이 바로 광양 다압면의 섬진마을이다.
섬진마을의 매화는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늦게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유례없이 추운 겨울과 몇 차례에 걸친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린 탓이다. 하지만 봄비가 몇 차례 대지를 적시자 겨울잠에서 깨어난 매화가 하얀 등고선을 그리며 백암산을 오른다.
매화마을로도 불리는 섬진마을은 산비탈과 골짜기, 논두렁 밭두렁은 물론 마을 고샅길과 개울가까지 곳곳에 매화꽃이 피는 마을. 그 중에서도 3000여 개의 장독이 진풍경을 연출하는 청매실농원은 해마다 봄이 오면 매화꽃잎 만큼이나 많은 상춘객들이 찾는 명소.
매화가 지천으로 핀다고 해서 지명조차 매화마을로 바뀐 섬진마을은 본래 밤나무가 무성한 강마을이었다. 고(故) 김오천 옹이 1920년대에 처음으로 백운산 자락에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며느리인 홍쌍리 여사가 유업을 이어받아 돌산을 개간해 청매실농원을 일궜다.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옆 오솔길은 상춘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책로. 팔각정 전망대에 오르면 문학동산 너머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흐르는 섬진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인 초가집 주변의 문학동산에는 성삼문, 이병기, 윤동주, 김영랑, 정호승 등 유명 시인들의 시 30여 편이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시심을 돋운다.
문학동산에서 눈길을 끄는 시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이 꽃잎들’로 시인은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피는 꽃을 보고 못 견디겠다며 차라리 눈을 감는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에 차라리 까닭 없는 분노가 인다”고 노래했다.
백운산 중턱의 전망대는 청매실농원은 물론 섬진마을과 섬진강, 그리고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튼 하동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강 건너 북쪽이 화개장터고, 멀리 박경리 소설 ‘토지’의 고향인 평사리도 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섬진강 모래톱보다 하얀 시멘트길이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지리산 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풍경도 이색적이다.
매화꽃은 밤에 더욱 청초하다. 섬진마을의 하늘이 암청색으로 물들고 섬진강과 백운산에서 피어오른 운무가 섬진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기 시작하면 백매화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난다. 이어 어둠에 묻혔던 섬진강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내면 달빛에 젖어 더욱 하얀 매화가 은하수가 내려앉은 듯 섬진마을을 수놓는다.
섬진강 꽃길에는 섬진마을처럼 아름다운 강마을들이 남도대교까지 이어진다. 다사마을, 소학정마을, 고사마을, 항동마을, 죽천마을, 평천마을, 직금마을. 염창마을 등 이름조차 멋스런 섬진강 강마을들은 해마다 이맘때면 하얀 눈이 내린 듯 매화꽃들에 둘러싸여 꽃동산을 연출한다.
드라마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강 건너 하동 평사리를 건너다보며 달리던 섬진강 꽃길은 광양 하천마을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남도대교를 건너 하동 화개장터에 이른다. 김동리 단편소설 ‘역마’의 무대이자 ‘박경리 토지길’과 ‘이순신 백의종군로’가 지나가는 화개장터는 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로 유명해진 추억의 장.
화개장은 끝자리가 1, 6일인 날에 열리지만 장날보다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에 더 붐빈다. 초가지붕이 멋스런 장옥은 재첩국이나 장터국밥을 파는 음식점과 건어물전 등이 차지하고 있다. 장터 구석에 위치한 대장간에서는 늙은 대장장이의 망치질 소리가 아련하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십리길과 화개장터에서 하동읍내까지 이어지는 19번 국도는 벚꽃으로 유명한 곳. 올해는 매화의 개화 시기가 늦어 이달 말쯤 피는 벚꽃이 매화와 함께 낙화하는 기현상도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매화가 광양 섬진강변을 수놓기 시작하면 구례 산동마을의 산수유꽃도 질세라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먼저 핀 매화를 시샘이라도 하듯 상위마을을 비롯해 반곡마을, 계척마을, 현천마을 등 산동면 일대의 크고 작은 마을은 콩알만큼 작고 샛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려 붓으로 노란 물감을 칠해 놓은 듯 장관을 연출하다.
매화와 산수유꽃, 그리고 벚꽃이 피고 지고 온갖 야생화들이 길섶을 수놓는 섬진강 꽃길. 꿈에도 잊지 못할 그 꽃길이 실핏줄 같은 섬진강 물길에 꽃향기를 싣고 북으로 북으로 꽃소식을 전한다.
광양·하동·구례=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