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정원교] 보시라이 정국 찬찬히 보기

입력 2012-03-20 18:14


2007년 3월 24일 오후 상하이시 옌안시루(延安西路)에 있는 전람센터 3층. 허궈창(賀國强) 당시 중앙조직부장과 시진핑(習近平) 저장성 서기가 긴급 소집된 상하이시 당·정 간부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하이시 서기 직무대리였던 한정(韓正)도 자리를 함께 했다.

허궈창은 당 중앙의 결정을 선포한다. “시진핑 동지를 상하이시위원회 위원, 상무위원 및 서기에 임명한다. 한정 동지는 더 이상 상하이시 서기 직무를 대리하지 않는다.”

홍콩 빈과일보는 이에 대해 “장(江)과 후(胡)의 격렬한 싸움으로 태자당 어부가 이익(어부지리, 漁父之利)을 봤다”고 보도했다. 장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후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가리킨다. 태자당 어부는 물론 시진핑 부주석. 한 해 전인 2006년 9월 상하이시 서기였던 천량위(陳良宇)가 낙마한 뒤 어수선했던 상황은 이로써 정리됐다.

당 중앙은 당초 상하이에 동요가 생길 것을 우려해 상하이 시장 한정에게 서기 대리를 맡겼다. 한정은 상하이 시장으로서 ‘천량위 부패 사건’을 몰랐을 리 없다는 지적 때문에 자신이 ‘한시적인 관리인’에 그칠 것이란 운명을 자각하지 못했다.

5년 전 상하이와 지금 충칭 상황이 너무 흡사하다. 허궈창과 시진핑이 리위안차오(李源潮)와 장더장(張德江)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리 조직부장이 지난 15일 장 부총리를 대동하고 충칭 당·정 간부 회의에 나타나 ‘군기 잡기’를 하면서 보시라이 후임자를 소개했던 장면은 2007년 당시의 복사판이다. 단 하나 달라진 부분은 충칭 회의에는 보시라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황치판(黃奇帆) 충칭시장도 한정과 비교된다. 그는 보시라이와 왕리쥔은 사라졌지만 리위안차오와 장더장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5년 전 한정도 상하이시 서기 대리를 맡게 되자 감읍해 마지 않았다.

황 시장은 누가 뭐래도 ‘보시라이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도 한정처럼 충칭이 안정을 되찾는 대로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처지다. 본인이 이러한 상황을 깨닫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렇듯 과거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대부분 움직임이 물밑에서 벌어지는 중국의 경우 특히 그렇다. 이제 당국이 보시라이의 부패 문제를 걸고 나섰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예상됐던 수순이다. 그가 후 주석 노선과는 달리 좌파적 행보를 보이다 ‘희대의 정치 사건’ 중심에 서게 됐지만 구체적인 비리를 들이대야 결정적인 ‘한 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보시라이가 해임된 뒤 그와 유착관계에 있었던 기업인들 이름이 떠돌던 중이었다. 랴오닝성 다롄에 있는 W그룹, S그룹 회장 등…. 천량위의 낙마도 그가 장 전 주석을 등에 업고 후 주석 체제에 항명하다 ‘사회보장기금 비리 사건’에 엮인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엮였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중국에서 당 간부들 중 업자에게 크고 작은 혜택을 주고 반대급부를 받는 행태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는 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그래서 언제든 ‘걸면 걸리는’ 것이다.

이번 권력 투쟁의 향방을 놓고도 과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시진핑은 상하이시 서기를 발판으로 7개월 만인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일약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도약했다. 동시에 상하이방·태자당 연합이 정치국 상무위원 9자리 중 6자리를 차지했다.

후 주석(공청단파)이 천량위 거세를 주도했지만 이득은 상대편에게 넘어간 셈이다. 그래서 개혁파 쪽 월간지 옌황춘추(炎黃春秋) 사장 두다오정(杜導正)은 지금 향후 형세를 판단하기는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베이징=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