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음식의 영성

입력 2012-03-19 18:29


지난 주말 오래된 영화 ‘식객’을 보았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를 신문연재에서 워낙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만화의 재미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꽤 흥미롭게 보았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주인공의 음식에 대한 예술가적 장인정신이었다. 일상적으로 하찮게 생각하던 먹는 일이 단순히 빈 창자를 채우는 것이 아닌 삶의 예술일 수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음식장만을 귀찮게 생각하며 쉽게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려 했던 잘못된 기러기 아빠의 식생활 방식도 다시 한 번 반성해 보는 시간이었고, 만드는 기쁨이 먹는 즐거움에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다짐을 갖게 해주는 영화였다. 동시에 주인공의 음식재료에 대한 지극정성은 먹히는 것들에 대한 존경심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다. 영화를 보며 언젠가 나도 요리학원을 다녀 저런 요리들을 정말 맛깔나게 해봤으며 하는 충동이 일어났다.

영화의 스토리라인 못지않게 감동을 준 것은 “이 세상 최고의 음식 맛은 어머니의 숫자만큼”이란 대사였다. 이 짤막한 멘트에 그만 상영시간 내내 지금은 하늘나라 시민이신 어머니의 손맛을 생각했다. 사랑과 정성 하나로 된장찌개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끓여주시던 어머니의 손맛이 떠올라 화면의 장면마다에 오만가지 어린 시절 추억들이 오버랩 되었다. 그 된장찌개 맛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다면…. 이렇게 어머니의 손맛을 추억하며, 할머니의 그 구수한 손맛을 보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 자랑스러운 음식 맛을 결코 입으로만 설명해선 알 수 없을 터인데, 누가 그 음식 맛을 우리 집안에서 계승하지?

음악이나 음식은 우리 안에 잠재된 오래된 기억들을 끌어 올리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우연히 듣게 되는 한 소절의 음악이 기억 저편 깊숙이 묵혀놓았던 옛 기억들을 새삼스럽게 끄집고 올라와 잠시 과거의 추억과 회상에 빠뜨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맛깔나게 조리된 음식은 그 음식을 함께 나누던 사람들과의 정겨웠던 삶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의 삶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담론을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게 여기는 음악과 음식을 나눈 추억들의 단편들로 엮어져 한편의 이야기들이 되는가 보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던 고대의 사막 수도사들의 글들을 요약해 보면 그들의 삶은 한마디로 사소한 삶의 단편들에 대한 감사, 기도, 겸손, 용기였다. 그들은 아침 햇빛에 감사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음식과 음악이 가져다주는 사소한 삶의 기쁨들에 감사했다. 이러한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잃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영혼에 그림자가 끼어든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긴 침묵으로 삶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와 외경의 힘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그들이 말하는 금욕이란 삶의 기쁨을 거세시키는 고난이 아니라, 존재의 그릇을 넘어서는 과도한 욕심을 자제하는 훈련 이었다.

이러한 자기절제의 훈련을 통해 그들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존재에의 겸손과 용기를 훈련했던 것이다. 사막 수도사들이 보여주는 인생에의 태도는 그들의 음식에 대한 태도와 병행한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자연을 이용하고 허기를 채우는 데 필요한 만큼만 열매를 땄다. 그리고 먹히는 것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일상들을 통해 그들은 단 한 번 밖에 허락되지 않는 인생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갔다. 그들 영혼의 힘과 아름다움은 영혼의 겸손과 진정한 존재에의 용기에서 오는 것이라 믿는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사막수사들의 영적 향기에서 나오는 소박한 삶에 대한 사랑, 그러나 그 삶의 깊은 감동을 묘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성찬이므로 무릎을 꿇고 받아야하고,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의 입술과 마음속에는 ‘주여, 우리는 높은 자가 아니요’라는 말이 울려야 할 것이다.”

이번 주말엔 이모들에게 소박한 된장찌개의 맛을 배우러 가야 되겠다. 언젠가 그 맛을 재현하게 되면, 삶을 사랑하며 자신의 생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몇 분을 초대해 요리의 향연을 베풀어 보아야겠다. 내 가슴으로 기억하는 우리 어머니 이영애씨의 ‘이 세상 최고의 된장찌개 맛’으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