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택 (10) ‘1000만원의 유혹’을 극복케 한 아내의 불호령

입력 2012-03-19 18:29


“단장님, 오랜만입니다. 저랑 같이 일 좀 하시죠. 제가 극장식 식당을 개업하는데, 단장님이 음악을 좀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당장 계약금 1000만원을 드릴게요. 앞으로 보수는 서운찮게 해드리겠습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이 전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서 나간 자리에서 나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안 그래도 심심한데다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웬 떡인가 싶었다. 혹시 술집인가 해서 확인했더니 건전한 가족식당이라고 했다. 앞뒤 잴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계약금을 4등분해서 250만원은 차 바꾸는 데 쓰고, 250만원은 한동안 챙겨드리지 못한 어머니 용돈으로 드리고, 250만원은 교회 카펫 교체에 헌금하고, 나머지 250만원은 아내에게 주면 되겠다.’

계약금을 받아 상의 안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오랜만에 큰돈을 쥐었으면 기뻐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속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죄 지은 사람처럼 슬금슬금 아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박 집사, 이건 술집이 아니고 말이야. 가족 레스토랑이고…”

일부러 호칭까지 교회 식으로 부르면서 돈봉투를 꺼내들고 운을 떼는데, 아내는 금세 내 속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곤 어렵사리 연 내 말문을 일거에 닫아버렸다.

“당신 또 왜 그래요!”

아내의 불호령에 순간 뜨끔했다. 얄팍한 내 꼼수가 들통 난 기분이었다. 어머니 용돈을 드리고 교회 카펫을 바꾸겠다는 포장으로 내 실속을 차리겠다는 속셈이라는 자각이 일었다. AD로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의 BC의 생활이 아직 눈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롯의 부인처럼 소돔과 고모라 성에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꾸만 뒤돌아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단호함에 타협이란 없을 것 같았다.

“갖다 주면 되잖아.”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돈을 돌려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형 유흥업소나 요식업소엔 조직폭력배들이 판을 치고 있어 보복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여보, 나 하나님 빽 믿고 간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명함 한 장을 내보이며 집을 나섰다. 당시 나는 방배동에 있는 찬양신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작곡과 편곡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과분하게 선교음악과 교수 명함을 만들어줬던 것이었다.

“이 전무님. 죄송하지만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아니 단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개업 날짜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학생들에게 찬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개업에 지장이 없도록 좋은 연주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건네준 명함을 받아든 이 전무는 말없이 명함과 내 얼굴을 번갈아 몇 번 쳐다봤다. 불과 몇 초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이 내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행여 주먹이라도 날아오면 어쩌나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전무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단장님, 저도 일이 잘 안 될 땐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도 하고 그래요.”

정말로 뜻밖이었다.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 둘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어쩐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으로 홀가분했다. 비록 손에 들었던 거금을 도로 내놨지만 마음만은 구름 위를 날았다. 죄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내 입에서는 찬송가가 저절로 나왔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